세계적인 하이테크 제품 수출국인 한국과 일본의 갈등에 미국 실리콘밸리의 IT 공룡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한일 갈등까지 격화하면 전 세계 서플라이 체인에 장기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어서다.
미국 6대 IT 관련 협회가 유명희 한국 통상교섭본부장과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에게 한일 분쟁 해소를 촉구하는 공동 서한을 보낸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에서 생산되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는 애플, 아마존닷컴,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첨단 장비에 필수적이다. 지난 24일 퀄컴과 인텔 등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와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컴퓨팅기술산업협회(CompTIA), 소비자기술협회(CTA), 정보기술산업협회(ITI), 전미제조업자협회(NAM)등은 한일 양국에 공동 서한을 보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양국의 긴장을 억제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미국 IT 기업들이 주목하는 건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서 경제적 요소뿐 아니라 정치적 요소까지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경제적 관점에 입각해 경영 판단을 내렸다면, 한일 갈등을 계기로 앞으로는 정치적 관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 4일부터 한국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적인 3개 화학 제품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했다. 다음달에는 수출관리 우대 대상국인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할 전망이다. 이런 조치는 양국 간 해묵은 과거사 갈등에서 비롯됐다는 게 중론이다. 양국은 이번 주 미국 워싱턴과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조기에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 기업 단체들은 양국에 보낸 서한에서 “불투명하고 일방적인 수출 관리 정책의 변경은 공급망 혼란과 수송 지연을 야기하고, 외국에서 조업하는 기업 직원들에게도 장기적인 타격을 가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AMCHAM)는 25일 경제에 미치는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공정한 합의를 정리하도록 한일에 촉구하고 길어지는 갈등은 세계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5일 “세계 공급망을 민족주의의 벽이 가로막고 있다”며 “하이테크 기업의 상호 의존 관계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등의 생산에 있어서 얼마나 약점이 되고 있는지를 부각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의 생산이 몇 주만 지연돼도 애플 아이폰 판매와 아마존의 클라우드 컴퓨팅 데이터 서비스, 다양한 커넥티드 기기의 재고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S&P글로벌레이팅스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수석 이코노미스트 숀 로치는 “하이테크 산업의 서플라이 체인의 정치 문제화는 중대한 위협”이라고 지적하며 “5년 전에는 이런 사태에 대한 대응이 필요없었다. 지금까지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비즈니스에 관한 판단을 내렸지만, 이제는 정치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애널리스트들은 지난 4일부터 시행된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 조치가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 혼란을 초래했는지에 대해선 아직 알 수 없다고 한다. 생산 지연을 회피할 수 있을지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대체 공급처를 확보하느냐 여부에 달렸다고 본다.
골드만삭스는 22일자 보고서에서 일본이 검토 중인 수출 제한은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 약 520억 달러 상당의 물품 거의 전부에 일시적인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해 한국의 수입 중 일본 제품은 약 11%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