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정치경제부 기자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압박을 대하는 한국 정부의 처지도 비슷하다. 개도국 지위를 주장할 명분이 궁색하다. 국민소득이나 무역 규모 등 한국의 성적표가 너무 좋아서다. 개도국 혜택을 받는 농업 부문도 그렇다. 농가 소득과 국내총생산(GDP) 대비 농업 생산 비중 등 농업 지표에서 한국은 선진국들과 큰 차이가 없다.
설득 논리가 없다 보니 개도국 지위 문제는 한국 외교의 ‘아픈 손가락’이 됐다. 일본이 ‘덩치에 안 맞게 개도국 혜택을 누리는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며 한국의 개도국 지위를 자국의 경제 보복을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무리하게 개도국 지위를 고집하려 들면 명분은 물론 실리까지 잃게 된다.
지금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농업 관세·보조금 혜택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차기 농업 협상까진 기존 혜택을 누리면서 연착륙을 준비할 시간이 있다.
시급한 건 농업 직접지불금(직불금) 제도 개편이다. 쌀 농가의 경우 소득의 10% 이상을 변동 직불금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도국 지위를 잃으면 변동 직불금 예산이 크게 줄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정부와 국회에서 고정·변동 직불금, 논·밭 직불금을 통합해 공익형 직불제 도입을 논의했지만, 여야 정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공익형 직불금은 WTO의 보조금 규제를 피할 수 있는 해법으로 꼽힌다.
근본적인 농가의 소득구조 개편도 필요하다. 농업과 식품산업 간 연계를 강화하고 해외 판로를 넓혀야 한다. 보조금 의존도를 줄이고 외풍에 대한 내성을 강화할 수 있는 길이다.
피할 수 없는 짐이라면 그 무게를 최대한 줄일 방법을 찾는 게 차선이다. 명분을 잃으면 실리도 챙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