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만 한국 개인전 양혜규, 국제갤러리 '서기 2000년이 오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전시장으로 향하는 골목길엔 가수 민해경이 1982년 발표한 '서기 2000년이 오면' 노랫말도 들린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우주로 향하는 시대/ 우리는 로케트 타고 멀리 저 별 사이로 날으리/ 그때는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
서울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 '서기 2000년이 오면'을 연 양혜규(48) 작가를 만났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하관에 붉은 칠을 한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 서면 제정신이 아니어서 변신합니다. 무당이나 배우처럼 떨쳐입고 나와 용기를 내서 축제를 같이 즐기고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어요."
전시 제목 '서기 2000년이 오면'은 민해경의 동명 유행가에서 영감을 얻은 게 맞다. 소리 나거나 움직이는 일련의 조각 연작이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만나고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상상과 연대의 공간이 됐다. 노래와 그림, 두 개의 시청각 기표는 저마다의 시간과 장소, 공간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 그리고 막연한 향수를 불러온다. 그러면서도 시공간에 얽혀 있는 복합적인 감각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서기 2000년엔 로켓 타고 별 사이를 날아다닐 거로 생각했던 1982년의 소망 혹은 감성은 헛수고였을까.
그는 "후렴구를 '사바 사바'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지하고 막연했다는 게 이번 기획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1982년 노래에서는 2000년이 황당한 가사로 부를 만큼 먼 미래였어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2000년은 과거입니다. 시간은 한없이 분절되고 기억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죠."
새소리는 지난해 4월 남북 정상이 만난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 방송에서 추출한 것이다. 당시 독일에 있던 작가는 20시간 넘게 정상회담 중계방송을 지켜보던 중 새소리가 들릴 정도로 정적이 흐른 도보다리 비공개 회담 장면에 빨려들었다.
"다른 시공간에 사는 수많은 사람이 그 장면을 봤다는 데 압도됐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달 착륙 이후 실시간으로 가장 많이 시청한 중계 방송이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도보다리 회담 부분의 녹음을 다시 듣는데, 갑자기 조용해진 그때가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뛰어넘는 국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994년 독일로 건너간 작가는 현재 활동하는 한국인 미술가 중 몇 손가락에 꼽힌다. 그는 2009년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 2012년 카셀도큐멘터 참여, 2018년 독일 볼프강 한 미술상 수상 등 국제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번 전시는 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 '코끼리를 쏘다' 이후 4년 만의 한국 개인전이다. 지난해 프랑스 몽펠리에 라파나세 현대예술센터 개인전을 비롯해 최근 일련의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을 한데 버무렸다. 작가는 흔히 연관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역사적 인물들의 발자취나 사건들을 실험적인 방법으로 읽어왔다. 이를 통해 사회적 주체, 문화, 시간이라는 개념에 다원적이고 주관적인 접근을 꾀한다.
작가는 자신을 '조각가'로 규정한다. 미니 블라인드 여러 개를 조합한 대표작 '솔 르윗 동차'(2018~)는 바퀴 덕에 관객이 밀고 다닐 수 있다. 가로 9줄, 세로 10줄의 장기판 패턴은 바닥부터 벽으로 접혀 올려져 있다. 장기판 2개를 잇는 '중간 지대'는 빛을 반사하는 홀로그램 타공 시트지로 처리됐다. 이 격자 위에 놓인 향기 나는 짐볼은 관객 마음대로 움직인다. 전시는 오는 11월 17일까지 국제갤러리 K3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