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홀로 일본행...일본에서 먼저 사업 성공 20년 뒤 귀국해 롯데제과 설립하며 유통업 발전 기여 롯데그룹 재계 5위 기업으로 도약하는 초석 닦아
#. 1940년대 일본으로 건너간 빈털터리 20대 청년이 1960년대 초 성공한 사업가가 돼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그가 국내 제과 선두 기업인 롯데제과를 설립한 것이 1967년이다. 신격호 명예회장의 한국에서의 첫 시작은 롯데제과다. 군것질거리가 부족하던 1960년대 롯데제과의 껌과 과자는 국민들에게 큰 위안이 됐다. 이는 신 명예회장이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기업을 통해 사회 및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기업이념을 지켜낸 행보다.
#. 신 명예회장의 신념은 롯데그룹의 역사에서도 묻어난다. 볼거리, 살거리, 놀거리를 늘려 삶의 질을 바꾸겠다는 그의 신념은 현대식 쇼핑센터인 롯데백화점의 개관과 실내 테마파크 롯데월드의 건립으로 이어진다. 롯데호텔, 롯데월드타워까지 볼거리, 살거리, 놀거리의 질을 높이는 그의 행보는 계속됐고 이는 한국 관관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신 명예회장은 53년 롯데그룹의 역사다.
신 명예회장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 대기업을 일궈낸 자수성가형 기업가다. 맨손으로 껌 사업을 시작해 롯데를 국내 재계 순위 5위 그룹으로 성장시킨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과 우유 배달 등으로 고학 생활을 했다. 1944년 선반(절삭공구)용 기름을 제조하는 공장을 세우면서 사업을 시작했으나 2차 대전에 공장이 전소하는 시련을 겪었다. 일본에서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어 재기에 성공한 그는 껌 사업에 뛰어들었고 1948년 6월 ㈜롯데를 설립했다.
롯데는 그는 문학청년의 꿈을 키우던 시절에 읽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 소설은 독일의 문호 괴테가 지은 작품으로 여주인공인 샤롯데의 애칭이 바로 롯데였다.
신 명예회장은 “주목(侏木)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 했는데 샤롯데 역시 문학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 이라며 기업명을 롯데로 명명했다. 이후 롯데는 초콜릿,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해 성공을 거뒀다.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은 고국으로 눈을 돌렸다. 1950년대 까지는 한일간 국교가 이뤄지지 않아 신 명예회장은 꿈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러전 중 1960년 대 한·일 수교 이후 한국 투자 길이 열리자 그는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제과산업은 그가 가장 잘 아는 분여기도 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은 국민들,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좀 더 풍족한 먹을거리를 제공해주고 싶다는 의지에 따른 결정이다.
특히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뤄야 한다”는 신념으로 롯데호텔과 롯데월드, 롯데면세점 등 관광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1997년 개점한 롯데백화점만 봐도 처음부터 현대화된 유통구조와 세계적 수준의 인테리어를 갖춘 백화점으로 탄생해 국내 쇼핑 문화와 생활 문화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 수준으로 봤을 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도 크고, 다소 호화롭게 느껴질 수 있는 최고급 백화점이다.
국내 최고층 빌딩인 롯데월드타워 건설도 신 명예회장이 1987년 “잠실에 초고층 빌딩을 짓겠다”며 대지를 매입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대부분의 임직원들은 허허벌판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호텔과 백화점, 실내 테마파크 등 대규모 사업을 전개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존재 이유는 고객에게 만족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사업을 하는 것”이라며 밀어부쳤다.
대규모 쇼핑 타운으로 조성된 백화점을 비롯한 쇼핑몰은 우리 국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 모두가 즐겨찾는 명소로 부상했다. 그는 관광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관광산업 분야에서는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특히 경영권 갈등 속에 정신건강 문제도 드러났고, 90대 고령에 수감 위기에 처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법원은 정상적인 사무처리 능력이 없다며, 사단법인 선을 한정후견인(법정대리인)으로 지정하는 등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신 명예회장은 두 아들과 함께 경영비리 혐의로 2017년 12월 징역 4년 및 벌금 35억 원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은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