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로부터 리스료 지급 유예 요청받아
“조금만 늦춰주면 안 되겠습니까. 주기장료(항공기 주차료) 내기도 버겁습니다.”
“다 함께 살아야죠. 항공사가 문을 닫으면 어차피 금융사(증권·은행·연기금 등 기관 및 금융사)도 투자금을 날려야 할 처지 아닙니까?”
8일 서울 여의도에 자리 잡은 A금융사 투자은행(IB)사무실. 실무자 A팀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글로벌 항공사들이 셧다운 위기에 몰리면서 항공기 임차인들의 전화를 처리하느라 진땀을 뺀다. ‘협박 반 읍 소반’이다.
나 몰라라 할 처지도 아니다. 항공기 리스가 막히면 고객(기관투자자)들에게 수익률을 지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부실을 떠안아야 한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했던 ‘항공기 금융’시장이 코로나19영향으로 골칫거리가 됐다.
8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항공기 금융에 나선 상당수 국내 증권사와 은행, 자산운용사들이 주요 항공사로부터 리스료 지급기한을 유예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실제로 2조6000억 원이 넘는 항공기 금융 사업을 하는 메리츠증권은 일부 항공사로부터 리스료 지급 유예 요청을 받았다. 메리츠증권은 지난해까지 최근 3년간 총 62대의 비행기에 대한 항공기 금융을 주선했으며 이 중 일부는 직접 투자하고 있다.
지난 2017년 보잉 항공기 2대에 대한 항공기 금융을 주선한 하이투자증권도 해당 항공기를 임차하고 있는 에미레이트항공으로부터 리스료 지급 유예 요청을 받았다. KDB산업은행 자회사인 KDB인프라자산운용 역시 에어프랑스로부터 리스료 지급 유예 요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항공사 여객기는 항공사가 살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해외여행객이 늘어나면서 항공사들이 외형 확장을 하고 싶은데 당장 자금 사정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항공기를 빌려 쓰기도 한다. 금융사들은 이런 수요를 예측해서 미리 항공기를 사두고 임대해준 다음 일정액 수수료를 받는다.국내에선 이제 익숙한 자동차 리스 금융상품처럼 구조만 잘 짜면 연 3~7%대 수익률을 노릴 수 있다. 이른바 항공기 리스 시장의 구조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돌발변수가 생기면 수수료는커녕 손실을 떠안아야 한다.
IB 업계 관계자는 “항공기 금융을 해왔던 대부분의 증권사 은행, 운용사들이 항공사로부터 리스료 지급 유예 요청을 받았다”면서 “항공기 금융은 대부분 기관투자자에게 셀 다운(재판매)하기 때문에 수익자들의 의견을 취합해 항공사 요청을 수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우리은행·하나은행 등 시중 은행들도 항공기 금융 주선, 항공기 금융펀드 형태로 시장에 발을 담고 있다.
미래에셋대우는 항공기 금융시장 진출계획을 접었다. 최근 싱가포르에 항공기 리스 법인 설립과 관련한 법률 검토를 잠정중단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시아나항공 인수전 참여로 기대했던 시장 확대 계획도 물거품이 될 처지다.
금융사 대체투자 담당 임원 A씨는 “항공사가 부도난다고 해도, 리스료를 내야 운항이 가능하므로 최우선으로 리스료 집행이 이뤄지며 항공사가 파산해도 리스료는 상사채권이기 때문에 최우선 변제 대상이라 법적인 안정성도 높다”고 전했다.
그러나 항공산업의 위기가 특정 국가나 기업에 한정되지 않다는 점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보통 투자 수익률 관련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리스료나 원리금을 3개월 치를 미리 받아서 유보계좌에 두는 방식을 채택하기 때문에 당장 (리스료 등) 지급 유예 요청이 투자 수익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장기전이 되면 수익률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적기의 경우 각국 정부의 지원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지만, 민영 항공기의 경우 차라리 리스 계약을 해지하는 게 이득이 될 수 있다”면서 “이럴 경우 헐값으로 비행기를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고 수익률에 악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보잉 자료에 따르면, 항공기 금융에서 자본시장 비중은 2012년 9% 수준에서 2014년 46%로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