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e스포츠 스타 '페이커'(이상혁)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출판사 베가북스가 페이커 본인과 소속팀 SKT1의 동의 없이 책을 출간했기 때문. 베가북스가 출간한 '페이커랑 게임하자!'에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와 e스포츠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부록으로 페이커의 그림을 제공한다.
네티즌들과 게임 팬들은 즉각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본인이나 소속팀 동의 없이 상업적인 용도로 책이 나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에 베가북스는 "페이커 사진이 단 1장도 포함되지 않고 모두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며 "어떤 종류의 판권이나 초상권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사전에 법무법인들로부터 확인받았다"고 맞섰다.
◇법적 문제 핵심은 '초상권' 아닌 '퍼블리시티권'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의 이름과 사진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일은 꽤 오래전부터 일어나고 있다. 이 사건 역시 사진을 안 썼다고는 하나 본명보다 더 널리 알려진 '페이커'라는 게임 아이디, 그의 얼굴과 소속팀 이름이 표기된 유니폼을 동의 없이 무단으로 부록에 실은 점이다.
논쟁의 핵심은 바로 '퍼블리시티권'이다. 퍼블리시티권은 특정인의 이름, 얼굴, 이미지 등 경제적 이익이나 가치를 상업적으로 사용 또는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인격적 요소를 분리해 재산적 가치를 중시하고, 고액의 배상금 청구도 할 수 있다. 초상권과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유명 인사의 특징이나 고유의 무엇인가를 상업적으로 무단 이용하면 제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국내법에 명시돼 있지 않은 '퍼블리시티권'…법원 판결도 엇갈려
문제는 국내법상 퍼블리시티권을 명문화한 법조문이 없다는 점이다. 베가북스가 '법적으로 문제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퍼블리시티권에 관한 판결이 다른 경우가 많다. 일부 법원은 성문법에 명시돼 있지 않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05년 개그맨 정준하가 무단으로 자신의 얼굴을 캐릭터로 제작해 판매한 모바일 콘텐츠 제공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백웅철 판사는 "초상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등 퍼블리시티권을 침해했다"면서 "피고는 원고에게 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014년에는 퍼블리시티권이라는 권리 개념을 인정할 필요성은 있지만, 민법을 근거로 허용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왔다. 당시 유명 연예인이 한 포털사이트 운영회사를 상대로 퍼블리시티권 침해를 주장하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재판부는 "민법 제185조는 물권법정주의로 인해 법률로 규정되지 않은 퍼블리시티권은 배타적 권리로서 인정될 수 없다'라고 규정해 물권법정주의를 선언하고 있다"며 "상권으로서의 퍼블리시티권은 성문법과 관습법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베가북스, BTSㆍ류현진도 같은 방식으로 다뤄…팬들 "법의 심판 받아야"
베가북스는 이전에도 여러 유명인과 관련한 책을 출간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탄소년단(BTS),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과 협의 없이 이름과 이미지 형식으로 제작한 활동 내용을 책에 실었다. BTS의 공연과 무대 사진, 류현진의 투구 모습 등이 담긴 일러스트가 수록됐다.
이 사실을 접한 네티즌과 페이커 팬들 사이에서는 "양심이 있는 거냐"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게임 팬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 정도면 날로 먹는 것 아니냐. SKT1가 연락을 안 받았다고 출판사 단독으로 책을 낼 수 있냐"는 반응이 쏟아졌다. 특히,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리면 초상권에 안 걸린다는 출판사의 해명에 "어이없고 황당하다"라는 의견도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근본적으로 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평전이 본인 동의 없이 출판됐지만, 재판부는 "공적 인물인 신청인(박찬호)이 수인해야 할 정도를 넘어서서 신청인의 성명권과 초상권을 침해하는 정도로 과다하거나 부적절하게 이용됐다고 보이지 아니하다"고 판결했다(서울고등법원 1998.9.29, 98라35 판결). 이 판결을 근거로 개그맨 유재석의 위인전 역시 본인 동의 없이 제작됐다.
◇학계 "시대에 맞게 법 정비돼야"
2000년대 들어 퍼블리시티권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법조계 일각에서는 법을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름, 초상, 목소리는 물론 특정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경제적 가치를 지닌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법원 재판의 혼선도 생기고 있는 만큼 관련 내용을 제도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퍼블리시티권에 관한 해외 사례 연구'에서 "경제논리가 철저하게 적용되는 광고계에서 인격표지(이름, 초상, 목소리 등) 중 일부가 경제재로 거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환경이 바뀌었으면 그에 따라 법률이 이에 적응해야 한다. 성문법 체계에 있는 우리나라는 보다 적극적으로 명문화함으로써 퍼블리시티권의보호와 그 제한을 명확히 해 법적 안정성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윤석찬 부산대 로스쿨 교수는 '최근 저작권 판례와 쟁점'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서 "법 해석을 통해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퍼블리시티권 입법화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서 "부정경쟁방지법의 해석론을 통해 퍼블리시티권을 인정하고 이를 침해당했을 시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책임, 침해 부당이득반환 등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