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주핀란드 대사
북한에서 여성 권리의 역사는 4대 대중조직 가운데 하나인 여성동맹(여맹)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시대에 따라 여맹의 역할도 변화했는데 1960년대 중반까지는 여성을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개조하고 조직화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 주제는 당시 북한 남성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여성들에게 더 높았던 문맹 퇴치와 사회와 가정에 남아 있던 봉건적 잔재의 일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권리와 양성평등에 대한 함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맹은 1971년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 김성애가 위원장을 맡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 이때 여맹의 지위가 다른 대중조직과 같은 수준으로 승격되었다. 김성애가 위원장에 취임하는 행사에 김일성이 직접 참가하여 여성과 가정의 혁명화를 여맹의 주요 과업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여성 권리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하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983년 6월 김정일에 의해 소집된 여맹 대회는 여맹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김정일은 여맹의 제도 개편에도 직접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장 큰 변화는 맹원 자격의 변경이었다. 이전에는 만 18세 이상 여성이면 누구든 가입할 수 있었으나 이때부터는 직업동맹, 청년동맹 등 여타 대중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여성만으로 기준을 바꾸어 버렸다. 다른 대중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여성이란 대다수가 가정주부와 은퇴한 여성들이다. 여맹 회원이 크게 줄고 비중 또한 현저히 약화될 것임은 불문가지다. 김정일이 여맹을 약화시킨 배경에 여맹 위원장 김성애와의 갈등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김정일 시대 여성문제는 담론 차원에서도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당시 북한 선전매체들은 아들, 딸을 많이 낳아 견결한 총대투사로 키우는 것이 조선 여성들의 책임적 본분이라고 하였다. 공식 매체에서 여성의 역할을 수령을 결사 옹위할 ‘충성동이’를 많이 낳아 기르는 것으로 자리매김한 사례는 북한 말고는 없을 것 같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많은 북한 여성들은 국가 배급이 끊긴 상황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장마당에 나가 단속을 피해가며 장사를 해서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 가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았다.
최근에 김여정이 권력을 승계할 수 있을지를 놓고 말들이 오갔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의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여성이 최고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다고 했다. 북한에서 최고의 여성 영웅은 김정숙(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이다. 김정일 시대에 들어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가 활발해지고 김정숙 따라 배우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운동의 핵심적인 구호는 ‘모든 여성은 위대한 수령님을 목숨으로 견결히 보위한 백두의녀장군 김정숙 동지의 숭고한 모범을 따라 배워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을 결사옹위해나가야 한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근거리에서 김정은을 보좌하는 김여정의 모습은 북한 사람들의 눈에 전혀 거슬리지 않을 수 있다. 지난 5월 1일 순천비료공장 준공식에서 보여준 김여정의 모습이 한 예이다.
이처럼 북한에서는 수령을 옹위하는 데 한정되는 한 여성의 역할에도 한계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여성이 수령이 될 수 있는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북한의 역대 권력자들은 가족이나 혈통 가운데 자신의 권력에 도전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을 배제시킨 소위 ‘곁가지 치기’의 이력이 있다. 한편 지금까지 혈족 가운데 권력의 중심부에 들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여성들이다. 왜일까. 남자는 권력자에게 도전할 수 있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 때문일까. 역사는 북한의 가부장주의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사회적 엔지니어링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수령이 정하면 여성이 수령이 되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