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영ㆍ호용방ㆍ정영호ㆍ김홍기 디자이너…"개척자 이름에 맞게 글로벌 베스트셀링카 되길"
종이 위에 그린 스케치가 실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로 탄생하기까지 자동차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지 않는 순간은 없다. 올해 1월 출시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의 개발 과정에도 지엠테크니컬센터코리아(GMTCK) 소속 디자이너 수십 명이 처음과 끝을 함께했다.
트레일블레이저는 늘어난 중소형 SUV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지엠이 야심 차게 선보인 신차다. 출시 초기부터 날렵한 디자인과 공간 활용성, 다운사이징 엔진 등으로 시장의 관심을 받았다. 쉐보레 SUV 라인업에서 소형 트랙스와 중형 이쿼녹스 사이 차급을 책임지며 현대차 베뉴, 기아차 셀토스, 쌍용차 티볼리 등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트레일블레이저는 한국지엠의 연구개발 조직인 GMTCK가 처음부터 디자인과 개발을 주도했고, 내수와 수출 물량 생산까지 부평공장이 전담한다. 특히 이 차는 한국지엠이 경영난을 겪은 2013년 이후 처음으로 개발한 신차다. 무엇보다 매년 내수 판매가 줄고 있는 한국지엠의 경영 정상화를 이끌어야 할 과제를 안고 탄생했다.
개발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그만큼 더 매력적인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꼈을 법하다. 이투데이가 트레일블레이저 디자인에 참여한 황보영 GMTCK 디자인센터 인테리어 1팀장, 호용방 인테리어 3팀장, 정영호 익스테리어 3팀장, 김홍기 컬러 앤 트림 팀장 등 네 명의 디자이너를 15일 만났다.
◇디자인, 차 개발의 A to Z=“'드디어 나왔구나'라는 생각에 너무 뿌듯했죠.”
김홍기 팀장은 트레일블레이저가 오랜 시간 다양한 부서와 논의 끝에 성공적으로 출시됐을 때 감동을 숨길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비디오 경주 게임 '그란 투리스모'를 하다 차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김 팀장은 올해로 14년차 디자이너다.
뿌듯함과 후련함을 충분히 느낄 만큼 차 한 대를 만들기까지 디자이너는 수많은 부서와 협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디자이너는 먼저 초기 스케치를 시작으로 복수의 디자인 테마를 선정해 3분의 1 크기로 클레이 모델을 만든다. 하나의 테마가 선택되면 실제 차와 같은 크기의 클레이 모델을 만들어 디자인을 다듬는다. 이후 차의 공간감도 파악한 뒤, 이를 바탕으로 만든 디지털 데이터를 엔지니어에 전달해 구현 가능성을 살펴보는 과정을 반복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차가 구동하는 과정, 소비자가 원하는 사양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디자인도 그에 맞게 수정, 보완을 지속한다. 결국, 차가 출시될 때까지 수 년에 걸쳐 완성도를 높이는 디자인 작업은 계속된다. 다양한 부서와의 협업이 중요한 이유다.
◇차는 ‘하나’, 디자인은 ‘셋’?=경쟁 차종에 대응하기 위해 트레일블레이저는 디자인 다변화 전략을 취했다. 하나의 차체로 세 가지 디자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소비자의 다양한 취향을 모두 충족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은 트림별로 각자 다른 특색을 강조해냈다. 도심형 프리미어 트림을 기본으로 ACTIV 트림에는 아웃도어 느낌을 강조했고, RS 트림에는 스포츠카 디자인을 넣었다.
그만큼 개발 과정도 까다로웠다. 트레일블레이저 외장 디자인을 담당한 정영호 팀장은 “하나의 정해진 보디를 가지고 트림별로 차별된 개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필요했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엔지니어와 수많은 논의와 설득 과정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올해로 18년째 차 디자이너로 일하는 황보영 팀장도 "세부적인 트림과 사양을 구성하면서 유니크한 디자인 콘셉트를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이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만들어낸 만큼, 트림마다 차별화한 디자인은 소비자에게 내세우고 싶은 특색이기도 하다. 김홍기 팀장은 “RS 트림을 예로 들면, 전용 클러스터와 D컷 스티어링 휠, 기어노브, 레드 액센트로 스포티함을 더했다”며 “트림마다 특색을 살려 적용한 디자인과 소재를 고객들이 눈여겨 봐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디자인 다변화 전략은 국내 고객의 다양한 선호를 충족할 뿐 아니라, 수출 시장 대응에도 효과적인 선택이었다. 예컨대, 오프로드 분위기를 선호하는 미국 소비자에게는 ACTIV 트림을 앞세워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영호 팀장은 “ACTIV 트림에는 미국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해 밝은 크롬 대신 티타늄 크롬을 넣었고, 하단 스키드 플레이트에도 오프로드 분위기를 살렸다”고 설명했다.
◇‘핸따’, 한국지엠이 만들어 가능한 기능=트레일블레이저는 열선 핸들(일명 '핸따')과 애플 카플레이, 풀 파노라마 선루프 등 다양한 편의, 첨단 사양을 갖췄다. 호용방 팀장은 한국지엠이 개발을 주도했기에 상품성 높은 사양을 적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소비자만큼 꼼꼼하게 제품을 비교하는 고객은 없을 겁니다. 국내 고객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열선 핸들, 통풍 시트, 가죽시트를 적용했는데, 한국지엠이 개발을 주도해서 가능한 일이었지요.”
실제로 해외에서 생산해 들여오는 차에는 한국 소비자가 선호하는 기능이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국에서 생산해 수입하는 대형 SUV 트래버스에는 당초 전동 접이식 사이드미러 기능이 없었다. 미국과 달리 주차 공간이 좁은 한국에서는 필수 기능인데도 말이다. 결국, 한국에서 다시 이 기능을 추가하는 작업을 거쳐 출고됐다.
◇전에 없던 ‘이비자 블루’ 컬러, 트레일블레이저 상징으로=트레일블레이저가 처음 공개됐을 때 차의 독특한 색상이 큰 관심을 끌었다. TV 광고에도 등장한 이 색의 이름은 '이비자 블루'로 굳이 표현하자면 밝은 코발트블루에 가깝다.
김홍기 팀장은 이비자 블루가 전통적인 색과 차이가 있어 개발 과정에 고민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연식변경으로 추가할 수 있는 차체 색상의 개수가 제한적이지만, 당시 디자인팀은 트림별로 특색을 살린 색상을 넣기 위해 수많은 글로벌 GM 조직과 논의했다. 이비자 블루도 이런 논의 과정에서 탄생했다.
김 팀장은 "개발 당시에 호불호가 많이 갈렸지만, 새로운 색에 대한 확신을 갖고 진행한 결과 광고 차의 색으로 채택되는 등 대표색(키 컬러)으로 자리잡았다"고 회상했다.
디자인팀이 추구한 새로운 색상은 실제 시장의 호응으로 이어졌다. 트레일블레이저 고객의 약 30%가 이비자 블루와 아가타 레드 등 밝고 화려한 외장 색을 선택하고 있다.
◇앞으로의 쉐보레 디자인, ‘기본과 개성’의 조화=각 자동차 회사 디자인에는 ‘패밀리 룩’이 존재한다. 특정 디자인만 보고도 어느 회사의 차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공통된 디자인 요소를 말한다. BMW의 '키드니 그릴', 제네시스의 '두 줄 램프', 기아차의 '타이거 노즈' 등이 대표적이다.
쉐보레도 '듀얼 포트 그릴'이라는 공통된 디자인 요소를 갖고 있다. 전면부 그릴이 상ㆍ하단 두 개로 나뉜 형태이다. 하지만 의외다. 디자이너들은 쉐보레의 패밀리 룩 디자인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지양'하고 있다고 분명히 했다.
‘슬림하면서도 단단한 디자인’이라는 쉐보레의 디자인 언어 '린 머스큘러 디자인(Lean muscular design)'을 유지하면서도, 각 제품의 특성과 개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정영호 팀장은 "신차를 출시할 때마다 제품 특유의 페르소나를 살리는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다"며 "제품에 맞게 쉐보레의 얼굴을 어떻게 나타낼지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하고 연구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트레일블레이저는 지난달까지 5만 대 이상의 누적 수출과 꾸준한 내수 판매를 기록하며 회사의 경영 정상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지엠의 올해 1~4월 내수 판매량은 지난해 대비 11.6% 늘었는데, 트레일블레이저가 실적 개선을 견인했다. 출시 직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라는 변수를 만났지만, 초기 실적은 긍정적인 수준이다.
작은 스케치에 머물던 트레일블레이저가 시장에서 호응을 받고 수출되는 모습에 디자이너들은 한목소리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또, 어려운 시장 상황을 넘기고 이름에 걸맞은 차로 거듭나길 희망했다.
"개척자라는 트레일블레이저의 이름에 걸맞게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베스트셀링 카'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