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회사원 박모 씨는 얼마 전 서울 노원구에 있는 아파트 한 채를 매입했다. 당장 집을 살 계획은 없었지만 전셋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면서 전세를 끼고 집을 장만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 씨는 "평소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많아 부동산 온라인 카페에 들렸다가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격 비율)이 높은 단지를 소개하는 글을 보고 아파트 매입을 결심했다"며 "매매-전세가격 갭(차이)이 별로 없어 자금 부담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부동산 온라인 카페에는 '갭투자'(전세를 끼고 주택을 매입하는 것)와 관련한 글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재된 "종잣돈 2억 원을 어디에 투자해야 할 지 추천해 달라"는 글에는 현재 수 십개의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이 갭투자를 권하는 내용이다. 6억 원 이하 서울 외곽의 대단지 소형 아파트가 갭투자에 용이할 것이란 내용에서부터 OO동 OO아파트의 경우 현재 매매가와 전세가 차이가 딱 2억 원이라며 구체적인 답변까지 달렸다.
정부는 그간 서울 집값을 올리고 주택시장을 교란하는 주범으로 갭투자자들을 지목하고 규제 폭탄을 퍼부었다. 특히 갭투자에 활용되는 각종 대출을 제한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한 6·17 대책 이후에는 사실상 투기수요의 시장 진입은 막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새 임대차 2법(계약갱신청구권제ㆍ전월세 상한제) 시행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전세 수급이 불안해지면서 전셋값이 크게 상승하자 슬그머니 갭투자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게 현지 부동산 중개업소들의 설명이다.
실제 중저가 아파트가 밀집한 서울 외곽지역에선 갭투자 사례가 최근 부쩍 많아졌다. 부동산 빅데이터업체 '아실(아파트 실거래가)'에 따르면 최근 3개월 동안(2020년8월1일~10월 26일) 전세 끼고 아파트를 매입한 거래 사례가 가장 많이 증가한 곳은 노원구로 32건에 달했다. 이어 강서구 31건, 성북구 24건, 송파구 21건, 성동구 21건 순이었다.
이는 아파트 전세가율이 최근 들어 높아진 영향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KB국민은행 리브온에 따르면 지난 9월 서울 아파트 전세가율은 53.6%로 전달(53.3%)보다 0.3%포인트(p) 올랐다. 51개월 만에 상승세로 돌아선 것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무턱대고 오른 전셋값으로 인해 매맷값과 전셋값 사이의 갭이 1억 원대에 불과한 단지들이 적지 않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 한신3차 전용면적 69.44㎡형은 매매시세가 4억7000만 원 선으로 지난달 말 거래된 전세가(3억1500만 원)와 차이가 1억5500만 원에 불과하다. 인근 은빛1단지(전용 39.69㎡형)도 매매가(3억6700만 원)와 전세가격(2억1000만 원)의 차이가 1억5700만 원이다.
상계동 Y공인 관계자는 "임대차법 시행 이후 전셋값이 치솟으면서 매매값과의 차이가 많이 줄어들다 보니 전세를 알아보려 온 손님들 중에 매매로 돌아선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강서구와 성북구에는 매매-전세가격 차이가 1억 원도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강서구 화곡동 초록아파트 전용 58.65㎡형의 경우 전셋값이 5억6000만 원이나 매매가격은 6억4700만 원이다. 8700만 원을 투자하면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성북구 길음동 길은뉴타운 e편한세상도 갭 차이가 1억 원이 안된다.
강서구 화곡동 H공인 관계자는 "서울에서 실투자금 1~2억 원으로 집을 살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며 "문의는 많지만 매물이 없어 나오는대로 소화된다"고 말했다.
갭투자를 부추기는 전셋값 상승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전셋값 안정을 위한 추가 대책 발표에 나설 예정이지만, 전문가들은 대책에도 전세시장이 쉽게 안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시장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책만 내놓는다고 치솟는 전셋값을 잡을 수 없다"면서 "입주 물량 감소 등 내년까지 서울 전세시장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갭투자 바람이 다시 거세게 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