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검토를 지시한 '피의자 휴대전화 비밀번호 공개법안'을 두고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디지털 증거 압수 수색 시 협력 의무 부과 법안'이라고 명명된 이 법안은 휴대전화 비밀번호 공개를 강제하고 응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는 법률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진술거부권' 등 헌법을 위배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디지털 세상에 살면서 디지털을 다루는 법률 이론도 발전시켜 나가야 범죄대응을 할 수 있다"며 법안 추진 의지를 밝혔다. 추미애 장관은 "어떤 검사장 출신 피의자가 압수대상 증거물인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아 더 이상 수사가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다고 한다"며 "시급히 디지털 증거 압수 수색에 대한 실효적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영국 수사권한규제법은 2007년부터 암호를 풀지 못할 때 수사기관이 피의자 등을 상대로 법원에 암호해독명령허가 청구를 하고 법원의 허가 결정에도 피의자가 명령에 불응하면 국가 안전이나 성폭력 사범의 경우엔 5년 이하, 기타 일반사범은 2년 이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한다"며 예시를 들었다.
추미애 장관이 예시로 든 법은 2000년 영국 정부가 입법한 수사권한규제법(RIPA)을 의미한다. 이 법은 국민 본인 동의나 영장 없이도 국가가 인터넷, 이메일, 통화기록 등을 조회할 수 있는 비상한 권한을 부여하며, 추미애 장관이 지목한 '정부의 피의자 암호해독 강제 권한'은 2007년 이 법에 포함됐다.
하지만 영국의 RIPA법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본래 테러 등 흉악범죄에 대응하고자 만들어졌지만, 시행 이후 일반 민간인의 정보까지도 조회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다. 2013년에는 영국 경찰이 이 법에 따라 언론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감청을 해온 사실이 폭로되면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 여론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같은 개인의 기본권 침해 논란에도 불구하고 암호 잠금 해제를 강제하는 ‘복호화 명령’ 제도는 영국 외에도 프랑스, 호주, 네덜란드, 싱가포르, 싱가포르 등 소수 국가에서 운영 중이다.
프랑스에서는 수사과정에 암호화된 데이터가 있으면 자격 있는 사람(과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수사를 위해 공식적으로 등록된 사람)에게 복호화 또는 복호화 키를 제공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 만약 복호화를 거부할 땐 최대 3년의 구금형 및 4만5000유로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호주에서도 치안판사의 명령에 따라 암호키 제출 또는 암호화된 데이터의 복호화를 요구할 수 있으며, 이를 거부할 시 최대 2년의 징역에 처한다.
한편, 법무부의 '휴대전화 비밀번호 공개법'은 헌법에 명시된 '진술거부권','과잉금지의 원칙' 등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법조계의 비판을 받는다.
우리나라 헌법 제12조 제2항은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진술거부권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의 진술거부권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해당 법률은 헌법상 '진술거부권' 원칙 및 형사소송법상 '피의자의 진술거부권'을 정면으로 침해한다는 것이 법조계의 주된 지적이다.
헌법학자인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 헌법의 진술거부권은 상당히 폭넓게 규정이 돼 있다"며 휴대전화 비밀번호 공개법이 헌법에 명시된 진술거부권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봤다.
추미애 장관이 언급한 영국의 RIPA법에 대해 한상희 교수는 "영국은 수사권을 행사하는 경찰 시스템이 우리와 다르다"며 "우리는 법의 근거가 있어야 수사를 하지만 영국은 법에 위반되는 소지가 없으면 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 역사적인 배경이 전혀 다르다"고 반박했다.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진술거부권과 관련해 "자백은 인간의 고유능력이 소통능력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서 강요할 수 없고 강제할 수 없다"며 "자백 강요를 금지하지 않으면 수사기관은 고문할 동기를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법무부에서는 13일 입장문을 통해 "법원의 공개명령 시에만 공개의무를 부과하는 등 절차를 엄격히 하는 방안, 인터넷상 아동 음란물 범죄·사이버 테러 등 일부 범죄에 한정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한상희 교수는 "헌법에서 금지하는 것을 법원에서 명령한다고 될 것이 아니다"며 "법원의 통제를 통해서 인권침해의 가능성을 줄이겠다는 것은 다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박경신 교수도 "수사대상범죄를 한정한다고 해도 비밀번호가 적용되는 휴대전화·컴퓨터처럼 개인의 삶 전반에 대한 정보들이 모여 있는 장치들을 열 텐데 위험이 너무 크다"고 반대했다.
한상희 교수는 "범죄를 한정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영국의 RIPA법처럼 기껏 해봐야 2년 징역일 텐데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는 아동 음란물 범죄와는 경중이 다르다. 오히려 범죄자들이 비밀번호를 일부러 공개하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만 마련해줄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최근 n번방 사건 등 압수 수색 대상의 암호를 푸는 '복호화'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선 "범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처벌을 못 하는 것이 근대형사법의 기본 원칙"이라며 "범죄를 처벌하겠다고 무리하다 보면 모든 사람이 국가 권력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라고 사실상 처벌에 대한 반대의 뜻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