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꿈꾸는 이유
해나(가명, 28) 씨가 3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건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미래에 ‘퇴사’와 ‘경력 단절’을 안고 가는 건 불확실성을 하나 더 추가하는 셈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도태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태껏 부모의 뜻대로 성실히 공부했고, 어른들의 조언대로 대학과 전공을 선택했다. 대학 시절엔 해외 인턴과 각종 대외활동으로 스펙을 쌓았다. 졸업 후 공백이 길어지면 취업이 어려워질 거란 생각에 PD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지만, 닥치는 대로 원서를 넣었다. 또래보다 빨리 취업에 성공했고 앞서가는 느낌이었지만, 직장에서 연차가 쌓일수록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졌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 90년대생 퇴사 꿈꾸는 이유= 취업 후 진로를 고민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모습은 해나 씨만의 일이 아니다. 입시와 취업에서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쌓으며 치열하게 경쟁하고 사상 최악의 취업난에 좌절하는 90년대생이지만, 입사한 지 1년 이내 퇴사하는 신입사원 비율은 늘고 있다. 구인구직 매칭플랫폼 사람인이 지난해 3월 시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신입사원을 채용한 기업 356개사 가운데 ‘조기 퇴사한 신입사원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64.6%였다. 응답 기업의 80.9%가 과거 세대보다 밀레니얼 세대의 조기 퇴사 비율이 더 높다고 밝혔다. 조기 퇴사자들은 입사 후 평균 5개월 내에 회사를 떠났다. 그들이 밝힌 퇴사 사유는 ‘개인의 만족을 가장 중시해서’(68.8%, 복수응답), ‘워라밸을 중요하게 생각해서’(44.1%),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해서’(33.3%), ‘참을성이 부족해서’(33.3%),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18.8%), ‘이전 세대보다 솔직해서’(18.3%) 등이었다.
IT 서비스 업계에서 창작자 지원 업무를 했던 해나 씨는 직장생활 4년 차에 ‘지금 하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누구나 대체할 수 있는 일은 아닌지’ 등 일의 전문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관심 있고 좋아했던 미술이나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에 다시 입학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시간과 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문제 앞에 용기를 내지 못했다. 당장 안정감을 주는 회사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며 내가 뭘 좋아하고, 진짜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고, 2018년 12월 아일랜드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해나 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현지 게임 회사에 취직했다. ‘생존’에 힘쓰다 보니 정작 진로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고, 여기서 평생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해나 씨는 “일 외에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고, 주위 사람의 심기를 살피거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이곳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워킹홀리데이가 끝나기 전 현지 회사에 취업해 정착하고 싶었지만 취업 비자를 지원해 주는 회사를 찾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2019년 12월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해나 씨는 재취업에 뛰어들었다. 전문성에 대해 고민하며 첫 직장을 그만뒀던 만큼 이전 직장에서 하던 일과 비슷한 일은 지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나 씨가 최종 합격한 곳은 이전 직장과 비슷한 사업을 하는 회사였고, 업무 역시 연장선이다. 해나 씨는 “업종과 상관없이 내 분야로 먹고살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서 알아봤는데 결국 붙은 곳은 첫 직장이랑 똑같은 IT 서비스 업체이고 창작자를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이래서 첫 직장이 중요하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재취업을 통해 회사와 일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었다. 나는 내 일이 전문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경력을 인정받아 재취업을 하니까 ‘이쪽 일이 전문성 없는 건 아니겠구나, 이쪽으로 경력을 쌓아도 되겠구나’ 생각하게 됐다”고 얘기했다.
이제 해나 씨의 진로 고민은 해소됐을까. 그는 다시 먼 미래를 그리고 있다. 해나 씨는 “전문성이 있다고 해도 내가 하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 유리한 일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다. ‘40세에도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이런 고민은 여전하다. 재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체적인 생각은 못 했지만, 내가 관심 있어 했던 미술이나 디자인 쪽을 배워서 부업을 준비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심정을 밝혔다.
◇회사는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 회사는 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90년대생은 1997년 외환위기를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당시 부모 세대가 겪은 좌절을 숱하게 듣고 읽으며 자랐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화, 그 중심에서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구나’ 체감하기도 했다. 휴대전화가 오롯이 전화의 기능만 하던 때를 분명히 기억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스마트폰을 접했고 또 익숙해졌다. 세이클럽, 버디버디, 싸이월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그 시대 주로 이용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굵직한 흥과 망을 경험하기도 했다. 내가 몸담은 회사가, 내 업무가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금세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체감하며 자라온 세대다.
제2금융권 회사를 6년 넘게 다니고 있는 강혜란(가명, 28) 씨는 매일 이직을 꿈꾼다. 그는 “정말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인건비는 많이 들고 수익은 안 나니까 지금 법인이 망하면 다른 법인에 합병이 될 거고, 그러면 인력 구조조정은 당연한 얘기다. 지금은 정규직이지만, 언젠가 계약직으로 신분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그려볼 때 오래가지 못하겠구나 싶지만, 당장 그만두고 재취업할 용기는 안 나니까 다니면서 자꾸 다른 곳 시험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회사가 나를 책임져 줄 수 없다는 불안감은 강한 확신이 됐다.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8월 19~55세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코로나19 사태 8개월 동안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직을 경험했다’라고 답한 비율은 15.1%로, 2개월 전인 6월(12.9%)보다 증가했다.
코로나19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항공업계 종사자 이슬비(가명, 28) 씨는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 다른 곳에 취업했다가 여러 번 낙방 끝에 원하던 직업을 갖게 됐지만, 갑자기 휴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엄청난 우울함이 느껴지고 자존감도 낮아졌다”며 “가장 힘든 건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다시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지, 돌아갈 순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 불안하니까 동료 중에는 다른 직업을 찾는 사람도 많다”고 밝혔다. 슬비 씨는 “휴직 기간에 공기업을 준비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정말 가고 싶은 회사가 딱히 없으니까 생각처럼 잘 안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붕 떠 있는 기분”이라고 털어놨다.
90년대생은 이 모든 현실이 한마디로 언짢다. 해나 씨는 “90년대생은 격동의 시대를 사는 것 같다. 다들 공무원이 되려고 하고, 공기업을 꿈꾸는 걸 비난만 할 순 없다. 그만큼 미래가 불안정하고 또 언제 잘릴지 모르니까 최대한 안정적인 걸 찾는 거다. 어릴 때는 공부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고, 대학에 갔더니 스펙을 쌓아야 취업할 수 있다고 해서 열심히 스펙 쌓고 취업했다. 그런데 30세에 다시 진로를 고민하고 정년을 걱정하고 있다. 이런 현실이 너무도 씁쓸하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