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철 안산유소아청소년과 원장
철강회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B는 다니던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친구 회사에 합류했다. 고향 친구인 우리는 모임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전화를 받았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몇 달 후에 같이 등산을 하게 됐는데, 진짜로 이상했다. 자세가 꾸부정하고, 신발을 바닥에 끌면서 걷고, 혀가 잘 안 돌아 말도 어눌하고, 얼굴 표정도 멍하니 나사가 풀린 것처럼 보였다. 파킨스병임을 직감했다. 본인은 괜찮다고, 요새 무리를 해서 그렇다고 했지만 같이 등산을 갔던 친구들은 다들 아니라고 했다.
B는 동창 모임에서 기분이 좋으면 옆 사람을 번쩍 들어 올릴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고 차돌멩이처럼 단단한 친구였다. “담배도 안 피우지, 술도 잘 안 먹지, 매일 배드민턴하지. 건강 하나는 끝내줘. 울룩불룩 알통에다 허벅지는 또 어떻고? 체력도 끝내주잖아? 밤마다 마누라 귀찮게 하는 거 아냐? 젤 오래 살아서 우리 회비 혼자 차지할걸.” 이런 말을 듣곤 했다. 등산 가면 물이나 먹을 거 같은 무거운 물건은 죄다 자기 배낭에 담아 메고, 놀러가서도 궂은 일은 도맡아 했었다.
술, 담배, 약물 남용, 생활습관병, 머리 외상, 과로처럼 뇌의 퇴행성 변화를 일으킬 만한 소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B는 파킨스병 진단을 받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다가 환갑을 얼마 안 남겨두고 쓰러져 사망하고 말았다. 자가용은 고사하고 외국여행도 안 갔을 정도로 알뜰하게 살아왔기에, 가장으로서 회사원으로서 친구로서 정말 성실하고 착하다고 인정받아 왔기에, 환갑이 다 됐음에도 야한 농담에 얼굴이 빨개질 만큼 순수해서, 더 억울했고 더 많이 허망했다.
B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없는 거라고는 해도, B에게 말도 안 되는 얄궂은 운명을 내려준 신을 대대적으로 성토했다. 검은 리본을 두른 B의 사진을 바라보며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욕도 하고, “어쩌겠냐? 이게 인생이고 이런 게 운명인걸!”이라고 위로도 해줬다. B가 이 말을 듣고 편하게 갔을지 아니면 끝까지 억울하다며 갔을지는 모를 일이다.
유인철 안산유소아청소년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