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12시 50분 서울 여의도 NH투자증권 사내 카페. 분주한 카페 한편에선 한 청년이 한 숟가락씩 레몬청을 용기에 담는 데 푹 빠져 있었다. 전자저울 눈금이 ‘80g’을 가리키자 그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손길은 차분하면서도 민첩했다. 주변에는 레몬청을 나눠 담은 컵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 순간 카페 매니저가 청년 뒤로 다가왔다. “재현(가명)님, 하다가 어려운 것 있었나요?” 계속 들어오는 주문에도 매니저는 눈을 맞추고 천천히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요. 없었어요.” “좋아요, 계속 지금처럼 해주세요.”
이곳에서 재현 씨는 ‘곰 청년’이라고 불린다. 재현 씨의 앞치마에는 ‘빨간 곰’ 배지가 달려있다. 무뚝뚝하고 남에게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지만 맡긴 일은 우직하게 잘 잘하는 이들, 그래서 ‘곰 청년’이다. 세상에선 이들을 ‘발달장애인(자폐성 및 지적장애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소속된 ‘베어베터(BEAR. BETTER.)’ 사명 역시 ‘곰 청년’이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베어베터는 인쇄, 제과, 사내 카페ㆍ매점, 꽃 배달 등 발달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운영한다.
올 3월 KTB투자증권에서 NH투자증권까지, 최근 여의도에서 본사를 이전한 증권사들이 ‘베어베터’를 통해 사내 카페를 조성했다. 봉사나 기부 차원을 넘어 장애인과 상생할 수 있는 사업장을 고민한 결과다. 이곳에선 ‘곰 청년’들이 정성스레 내린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다.
이를 위해 재현 씨는 여의도 증권맨보다 30분 이른 아침을 맞이한다. 7시 30분까지 출근해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안전교육을 받고 출근부를 작성한 뒤 머리에서부터 손톱까지 위생 점검을 한다.
이곳 매니저들은 매일 아침 1:1 상담을 하면서 오늘 일할 수 있는 기분인지 세심히 들여다본다. 마음 상태는 '괜찮아요'의 1단계에서부터 '힘들어서 도움이 필요해요'라는 5단계까지. 3단계부터는 매니저와 면담을 한 뒤 근로 여부를 결정한다. 이날 재현 씨의 마음은 1단계다. 매니저가 ‘마음’ 안부까지 확인한 뒤에서야 재현 씨는 커피를 내릴 수 있었다.
생두에서 시작된 향기는 몇 명의 곰 청년 손길을 거쳐 커피 한 잔에 담긴다. 베어베터는 발달장애인 직원들이 일할 수 있도록 직무를 세세히 쪼개 세분화했다. 커피 추출, 포스기 담당, 얼음 담기, 커피 픽업 담당 등. 혼란스럽지 않게,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됐다.
열심히 얼음 컵을 준비하던 한 곰 청년이 손을 놓고 꽤 오랜 시간 가만히 있자 매니저가 다가가 말을 건넸다. 관리자는 발달장애인이 업무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도록 직무를 쉽게 만들고,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이들은 학생에게 하듯 개입하지도 않았다.
업무도 간단하게 조정했다. 시럽마다 몇 번 펌프질해야 하는지 등 작업 문구가 붙어 있었다. 난도가 높은 캐러멜 마키아토는 시럽을 미리 녹여서 계량화해뒀다. 픽업 대에 있던 곰 청년이 ‘빨대는 이쪽에 있습니다’라는 말을 빠뜨리자 매니저가 다가가 짚어줬다. 그 청년은 ‘이쪽’이라는 말과 함께 팔 방향을 가리키면서 반복 연습했다. 누구보다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였다.
배송팀에 있던 태호 씨(가명)는 최근 NH투자증권 카페팀에 합류했다.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가장 재밌다고 했다. 그는 “얼음 넣고, 샷 넣으면 끝이다. 다른 음료보다 쉬워서 좋다. 또 여기(파크원 타워2)는 건물이 높아서 좋다”고 말했다.
사업장의 배려도 곳곳에 묻어있었다. NH투자증권과 KTB투자증권 모두 초반 일주일 동안 손님을 받지 않았다. ‘곰 청년’들이 각자 맡은 임무와 동선을 익힐 수 있도록 여건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다. 또한, 이들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휴식할 수 있도록 ‘휴게 공간’을 따로 마련해뒀다. 이 밖에도 수시로 애로사항을 전달할 수 있는 소통 채널 지원에도 힘쓰고 있었다.
KTB사내카페를 이용한 한 직원은 “사실 발달장애인 직원분들인지도 몰랐다. 일회성에 그치는 기부금보다 이런 사내 카페들이 늘어난다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더 지속 가능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NH투자증권의 직원도 “비장애인 매니저들도 같이 일하면서 호흡도 좋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커피가 맛있다”며 마스크 너머 눈을 웃어 보였다.
이진희 베어베터 대표는 “우리는 서로가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한다. 증권사는 ‘증권팀’, 우리는 ‘카페 팀’으로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각자 잘하는 일터를 만드는 것 역시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