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대 교수, 전 경기과학기술진흥원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일 K글로벌 백신 허브화 비전·전략 보고 대회를 가졌다. 내년 상반기까지 국산 백신을 개발하고, 4년 뒤인 2025년까지 백신 5대 강국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이 기간 중 2조2000억 원을 투입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K브랜드’를 기치로 내걸었다. 정부의 거의 모든 부서와 지자체, 공공기관, 심지어 기업들까지 ‘K어쩌구’는 가장 편하고, 가장 안전한 구호가 되었다. 언론에 보도된 것을 대강 찾아봐도 50개는 족히 넘는다. 한국판 뉴딜을 K뉴딜로 부르는 것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K백신, K배터리, K컬처를 넘어 이제는 K메타버스, 심지어 K방조제 새만금까지 나왔다. 그래서 문 정부의 정책을 한마디로 ‘K어쩌구(정책), ~강국’이라고 시니컬하게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지난 4년여 동안 ‘K브랜드’가 정착되는 가운데 우리는 더욱 편협해지면서 내향적으로 되어 버렸고, 시야는 좁아졌다. 세계의 흐름을 안다고 말로만 떠들고 있지 대변화의 높은 파고를 헤치고 노를 저어갈 자세는 여태껏 보이지 않는다. K백신과 5대 백신 강국이 허무하게 들리는 이유다. 여당의 모 국회의원이 ‘K양극화’라고 지적하는 게 차라리 설득력이 있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에 가장 절실한 것은 ‘디지털경제를 선도하는 산업기술정책’이라고 말한다. 뒤늦은 각성이지만 제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우선 국내외를 둘러싼 환경을 보면 우리의 상황은 풀어 나가기가 녹록지 않다. 대외적으로 미·중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패권경쟁이 상시화되었으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디지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무역·기술·표준 경쟁이 심화되고, 신기후체제 출범(탄소중립)에 따라 수소경제와 녹색경제가 전면에 대두됐다. 대내적으로는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둔화(노동의 질 저하)되고, 국내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있다. 중견·중소기업의 경쟁력은 약화됐다. 이에 더해 고실업률(청년실업),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은 경제를 크게 압박하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이런 불안정 요인들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기술혁신, 생산방식 전환, 노동구조 변화(노동 유연화, 플랫폼 노동, 디지털 인력 등), 생활양식과 소비패턴의 변화 등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글로벌 규모로 전개되고 있다.
산업자원통상부 산하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이러한 시대를 선도할 산업기술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신 혁신동력 창출, 산업·지역 불균형과 저성장·양극화 해소, 중소·중견기업 경쟁력 강화, 기술사업화 활성화, 디지털 개방형 혁신, 디지털 인재 양성 등에 대한 포괄적 대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혁신전략연구소는 ‘미래혁신 2030 포럼’을 통해 전문가들의 제안을 정리했다. 기술과 사회 변화에 대응한 국가 연구개발 거버넌스의 개편과 대학·출연연구기관의 역할 강화, 사회적 기술개발 확대 등을 우선순위로 꼽았다.
정권 말에 추진하는 정책이 추동력을 갖기 위해선 ‘역산(逆算)의 발상’이 중요하다. 남은 10개월을 거꾸로 계산하면서 행정의 긴박감을 높여가는 것이다. 또한 크고 굵직한 과제보다는 작지만 절실한 과제를 먼저 챙기는 게 바람직하다. 실천력을 높이는 게 관건이다. 피로도가 상한치에 이르고 있는 관료들에겐 ‘꼭 해야 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주지시켜야 한다.
9월 국회, 10월 국정감사, 대선 정국의 전면적 확대 등 한층 복잡해지는 이 시기야말로 다시 한번 경제·산업·기술 동향을 점검해 봐야 할 때다. 이러한 점검은 위기 대응에 대한 국가적 컨센서스를 이루는 지름길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가 현 위치를 제대로 알아내고, 침로를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