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인문학 저술가
인간은 왜 놀이의 마법에 이끌리는가? 놀이는 일상의 질서 바깥에서 벌어지고, 일상의 규범이나 의무가 없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놀이는 놀이 스스로를 즐겨 비밀스러운 분위기로 감싼다”.(호이징하, ‘호모루덴스’) 놀이는 탈규범적이고 비억압적이며, 그것만의 고유한 리듬에 따른다. 호이징하에 따르면, “질서, 긴장, 운동, 변화, 장엄, 율동, 환희” 등등은 놀이의 고유한 요소들이다. 놀이는 행위의 드라마화이고, 그 안에 흥분과 재미를 느낄 만한 여러 요소들의 집약이다.
바둑과 장기는 동양에서, 체스는 서양에서 고안된 것이다. 바둑과 장기는 여흥으로 즐기는 잡기라는 점에서 같지만 둘은 본질에서 다르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따르면, 장기는 제도화되고 규칙화되어 있는 전쟁이고, 전선과 후방, 다양한 전투 등이 코드화되는 데 반해 바둑은 전선 없는 전쟁이고, 전방과 후방의 분별이 없는 이상한 게임이다. 장기나 체스는 국가 같은 체계가 있고, 장기의 말은 왕과 신하로 나뉜다. 장기의 말에는 각각의 이름(혹은 계급)이 부여된다. 장기는 수목적 체계에 기반해 진영을 짜고, 말들은 일자(一者)를 중심으로 위계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장기의 말들이 규범을 지킨다면 바둑알은 혼돈 속에서 흩뿌려지는 낱알이다. 장기의 말들은 왕을 지키지만 바둑알은 제 몸을 던져 지켜야 할 최고 존엄이 없다. 바둑알은 익명이고, 산술적 단위에 지나지 않는 무리로 자신을 드러낸다.
바둑알은 큰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낱알이고 알약이지만 알곡의 성분 없이 텅 빈 상태이고, 어떤 플라시보 효과도 없다. 다만 너른 공간에 흩뿌려져 흩어지는 이것은 익명이고, 파업하는 무리이며, 집합적 단위로 평가를 받는다. 바둑알은 국가 기계 안에서 징집되는 국민이다. 바둑알은 낱낱으로 떼어진 상태로 공간에 투입되고 배치되는데, 이 투입과 배치는 무작위적이다. 포석 단계에서 흩뿌려질 때 바둑알은 흔히 널리 알려진 정석을 따른다. 이때 바둑알은 위상적이고 규범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하나하나는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바둑알은 하나의 개별자로서는 아무런 힘도 위상도 갖지 못한다. 바둑알은 상호 연결되고 접속하는 한에서 힘을 갖고, 다른 알과 조응할 때 비로소 위력을 발휘한다.
바둑알은 부피도 무게도 갖지 않는다. 바둑알은 몸이 없고, 따라서 바둑알엔 고통도 없고, 어떤 낙인도 찍을 수가 없다. 그것은 고통을 모르는 익명의 존재이고, 공간 속에서 배치되는 무리지만 있음의 잔여물로써 바둑알들은 상호 배열 속에서 그 중요성이 드러날 뿐이다. 바둑알은 셀 수 없는 모래알들이다. 하지만 바둑 게임은 항상 인구조사를 하고, 그 수를 헤아린다. 바둑알은 태어나는 아기들이다. 그것은 생성의 유희를 위해 영토 안에 내던져지는 개체들. 이들을 징집된 자, 적진을 탐색하는 척후병, 군번을 부여받지 못한 채 삼인칭 기능을 하며 투입되는 무명용사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은 영토의 경계를 설계하고 이것을 분할하는 전략과 기세를 겨룬다. 바둑에서 영토는 제일의(第一義)적 가치이고, 승리를 산출하는 자산이다. 바둑에서 영토는 주인 없이 방치된 빈터이다. 주인이 없는 빈터들. 바둑은 이 빈터에 대지의 질서를 세우는 게임이다. 대지의 질서는 지배되고 포획되는 것의 원리를 따른다. 바둑이 중반을 넘어서면 벌써 영토의 경계가 확정되고 그 주인이 정해지면서 빈터는 차츰 줄어든다.
바둑판은 고른판이다. 이 고른판에는 피 흘리는 이면이 없다. 다만 이 고른판을 지배하는 움직이는 손이 있을 뿐이다. 이 손은 상징적인 뜻에서 보이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바둑알은 옮기는 것은 동요하는 손이다. 손이 안절부절못하고 끝없이 동요하는 것은 지배 욕망 때문이다. 바둑은 동요하는 손이 그린 그림일지도 모른다. 늘 중간에서 움츠리며 동요하는 손은 알고리즘(algorithm)을 찾는 집단 지성의 대체재라고 할 만하다. 바둑에서 절차와 수학적인 계산이 중요하지만 이 손은 생산수단이나 규율권력으로 치환되지는 않는다. 이 손은 전략을 짜고 그 전략에 따라 바둑알의 투입을 결정하는 브레인이다. 이 브레인은 지능이 아니라 정신의 위력을 드러내는 차이에 따라 급수를 갖는다. 바둑 급수는 인구조사, 리서치, 영토를 구획하는 감각, 변전과 지루함을 버티는 능력의 차이로 갈라진다. 바둑은 의학이나 치료학이 아니라 전투의 시뮬레이션이고, 차라리 위상수학이나 서사학에 더 가깝다. 단순히 인습적 경험이 쌓인다고 바둑 급수가 달라지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바둑알은 중심도 주변도 없고, 주체나 객체와 같은 분별도 없다. 비둑알은 평등하며, 사막을 가로지른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중간에서 불쑥불쑥 나타난다. 중간은 사이-존재의 거점이고, 간주곡이다. “리좀은 시작도 하지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천 개의 고원’) 리좀은 뿌리줄기인데, 이것은 제 마음대로 뻗어나가며 중간에서 싹이 돋아난다. 바둑알은 체계와 질서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바둑알은 중간에서 나오고 중간에서 침투하며, 바둑알의 들고 낢에는 어떤 규칙도 질서도 없다. 바둑알은 흑과 백으로 나뉘어 오직 공간의 분배를 놓고 부딪친다. 공간을 차지하려는 두뇌 싸움 과정에서 무수한 선택의 오류와 시행착오가 일어난다. 바둑이 전선 없는 전쟁 게임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바둑알은 유목적 전쟁 기계에 가깝다.
어쨌든 바둑알은 경로를 정하지 않은 채 흘러간다. 바둑은 흐름과 흐름의 충돌이고, 바둑알 한 점 한 점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게임이다.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움직이고, 무규칙하게 흩뿌려진다는 점에서 바둑은 수목형의 질서가 아니라 리좀형의 사유방식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바둑에서 유목주의(nomadism)를 상상하는 건 자연스럽다. 유목주의란 토지나 영토에 종속되거나 정착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방식을 따른다. 노마드는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이동할 때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움직인다. 노마드는 최단 경로라는 원칙을 따르지 않으며 경로 선택은 늘 즉흥적이다. 이민자, 이주노동자, 홈리스, 입양아, 난민, 디아스포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노마드는 토지·건물을 탐내지 않고, 주택청약예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노마드는 영토화에 저항하며 끊임없이 도주한다. 따라서 이들은 언제라도 짐을 꾸려 이동할 수 있는 말과 게르를 선호한다. 21세기형 신인류로 등장한 노마드가 선호하는 것은 지식과 정보, 스마트폰, 노트북, 디지털 기기 따위다. 그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사업을 꾸리고 투자를 시행한다. 바둑알은 시작도 끝도 없이 움직이지만, 이것은 항상 공간에서의 생성(=되기)의 실현을 목적에 따른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놀이들이 있다. 바둑은 그 기원이 3500년 이상이 넘는 인류 사회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어온 놀이 중 하나다. 3500년 동안 수억 판 이상 바둑이 두어졌을 테지만 단 한 판도 똑같이 두어진 판은 없다. 내 경험으로 말하건대, 바둑은 인류가 만든 놀이 중 가장 변수가 많고 심오하며 재미있는 놀이다. 당신이 바둑에서 그 무엇을 상상하든 바둑은 항상 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