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은 국제경제부 기자
하버드대 로스쿨 객원 교수이자 출간 예정인 ‘인생을 위한 달러: 낙태 반대 운동과 공화당 기득권의 몰락’의 저자 메리 지글러는 50년 만에 재점화한 여성의 임신중단(낙태) 권리 논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지금의 정치 양극화와 사회 분열이 한층 더 악화할 것이란 이야기다.
지난주 미국 연방 대법원이 1973년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기로 한 판결문 초안이 언론을 통해 유출되면서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미국 구트마허연구소는 결정문 초안대로 대법원의 판결이 이뤄질 경우 미국의 절반 넘는 26개 주(州)에서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사실상 금지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 중 11개 주에서는 강간이나 근친상간 등으로 인한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면책 조항을 삭제하는 지역도 11곳에 이를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미국 사회에서 임신중단은 총기 규제와 함께 가장 민감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자유와 생명존중, 진보와 보수, 종교적 신념 등이 맞물리며 찬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진영 대립은 사실상 전례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에도 대립과 논쟁은 있었지만, 주 정부나 주 의회가 나서 법적 틀까지 만들며 향후 잠재적 합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며 극단적 상황을 만든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낙태 전쟁’이 민주주의의 기반인 선거까지 뒤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취임 이후 최저 수준의 지지율로 내몰린 조 바이든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국론 분열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취임 당시 분열된 미국을 결속시키겠다고 다짐했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세계 민주주의 진영의 리더인 미국이 자국 내 국론 분열을 봉합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위상이 타격받는 것은 물론 미국의 동맹국들도 영향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당장 3년째 낙태죄 관련 입법 공백이 이어진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강압적 통치의 우위를 주장하는 러시아·중국과 미국 주도의 민주주의 진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자유 민주주의’ 기능부전을 보여주는 사례도 될 수 있다.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와 합리적 민주주의는 이대로 흔들릴 것인가. 미국의 낙태 전쟁에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