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의 예상을 또다시 빗겨 갔다. 전문가들은 푸틴이 전승절인 9일, 전면전이든 종전이든 우크라이나 전쟁 구상을 밝힐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푸틴은 서방 탓을 할 뿐, 전쟁 향배 관련 힌트를 내놓지 않았다. 전쟁 장기화 우려와 함께 새로운 장(場)이 펼쳐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벤 월러스 영국 국방장관은 푸틴이 전승절을 우크라이나 전쟁 확전 기회로 삼을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그는 푸틴이 특별 군사작전이라는 포장을 벗고 전면전을 선언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병력과 물자의 대규모 동원이 가능해진다는 이유에서다.
푸틴은 이 같은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애초 전면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고, 서방의 예상이 맞아 떨어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을 수도 있다. 대신 푸틴은 과거 역사와 현재를 뒤섞으면서 자신이 벌인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러시아의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1945년 나치를 무찌르고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며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를 언급,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서방이 러시아 영토 침공을 준비 중이었다며 전쟁이 선제적 대응 조치였다고도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푸틴에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경제가 막대한 충격을 입은 상황에서 여론을 단속하기 위해 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는 것이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 대사는 CNN과 인터뷰에서 푸틴 연설에 대해 “축하할 만한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전쟁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토 주재 미국 대사 줄리안 스미스도 “푸틴 연설이 놀랍지 않다”며 “나치를 물리친 승리의 날, 억압과 침공을 동시에 기념하고 있다는 게 슬플 뿐”이라고 말했다.
이제 푸틴이 뭘 할지 또다시 수싸움이 필요해졌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군이 공중 폭격과 장거리 미사일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 같은 공격은 무차별적이어서 막대한 민간인 피해가 불가피하다. 지난 주말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의 한 학교를 폭격해 대피 중이던 우크라이나인 최소 60명이 사망했다.
토머스 그린필스 대사는 “확실한 건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푸틴은 철군도, 우크라이나와의 협상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전쟁이 몇 달 더 지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푸틴이 전쟁 원인이 서방에 있다며 화살을 돌린 날, 미국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속도를 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게 한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어 무기대여법 2022(무기대여법)'에 서명했다.
무기대여법은 1941년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동맹을 돕기 위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이 제안했다. 법안에 따라 대통령은 미국 방위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외국 정부에 군사 장비를 임대하거나 대여할 수 있다. 필요한 절차를 간소화해 신속하게 물자를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분쟁에 직접 개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에도 “미국은 민주주의의 무기고가 될 것”이라고 의의를 표명, 법안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개정된 법안은 지난달 상원을 만장일치로 통과한 데 이어 하원에서도 찬성 417표, 반대 10표의 압도적 표 차이로 통과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서명식에서 “푸틴의 잔혹한 전쟁에 맞서 조국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국민을 지원하기 위한 또 다른 중요한 도구를 제공하는 법안에 서명한다”며 “지금이 우크라이나에 지원에 대한 중추적인 순간”이라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악의적인 파괴라고 비난하면서 “전투의 대가는 크지만 침략에 굴복할 경우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