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서방, 인위적으로 디폴트 빠트려” 맹비난
푸틴 “루블화로 갚겠다”
경제적 영향 제한적…이미 대다수 국가서 돈 빌릴 수 없는 상태
러시아가 104년 만에 처음으로 외채에 대해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게 됐다.
러시아가 유로화 표시 채권에 대한 1억 달러(약 1296억 원)어치의 이자 미납금을 유예기간 내에 상환하지 못해 디폴트에 빠지게 됐다고 26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이 보도했다. 국채 이자 지급일은 지난달 27일이었는데, 30일의 유예기간이 이날로 끝나게 되면서 디폴트를 피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외채에 대한 러시아의 디폴트는 볼셰비키 혁명 당시인 1918년 혁명 주도 세력인 볼셰비키가 차르(황제) 체제의 부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지급을 거부한 이후 처음이다. 러시아는 1998년 디폴트 이전 단계라 할 수 있는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유예)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당시 문제가 된 것은 외채가 아닌 루블화 표시 국채였다.
이번 러시아 사례는 다른 국가들의 디폴트와 달리 국가 재정보다는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정치적 문제에 따른 결과다. 러시아가 갚을 돈이 없거나 상환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5월 “국제예탁결제회사인 유로클리어에 이자 대금을 달러와 유로화로 보내 상환 의무를 완료했다”며 “유로클리어가 개별 투자자들에게 송금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투자자들이 제재 때문에 돈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 재무부와 중앙은행, 국부펀드와의 거래를 전면 금지했다. 지난달 25일까지는 투자자들이 러시아로부터 국채 원리금이나 주식 배당금은 받을 수 있게 했지만 이후 유예기간을 연장하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가 경제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외채를 갚을 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만 서방 국가가 외국 은행 계좌와 지불 수단을 차단하면서 갚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이날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디폴트’라는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 인위적인 장벽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업계에서는 특정 국가가 외국에 의해 강제로 디폴트에 빠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제 신용평가사를 통한 공식 디폴트 선언도 없을 전망이다. 일반적으로 공식 디폴트 선언은 글로벌 신용평가사가 하는데, 서방 제재로 이들 신용평가사는 러시아에서 철수한 상태다. 다만 채권 증서에 따르면 미수 채권 보유자의 25%가 동의하면 디폴트가 발생한다.
‘국가 부도’로 통하는 디폴트 사태에도 러시아에 미치는 경제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는 이미 서방의 제재로 대다수 국가에서 돈을 빌릴 수 없고 해외 자산도 동결됐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이미 (러시아) 경제와 시장에 가해진 피해를 감안할 때 디폴트는 상징적이며,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과 몇 년 만에 최악의 경기 침체를 겪는 러시아인들에게 큰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시장의 관심은 이제 디폴트 이후로 쏠리고 있다. 이론적으로 채권자들이 해외에 있는 러시아 자산을 압류할 수 있지만, 그들이 향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일본 노무라연구소의 기우치 다카히데 이코노미스트는 “대부분 채권 보유자들이 관망하는 방식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는 지난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서명한 법령에 따라 채권 보유자들에게 루블화를 지급하는 계획을 성문화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재무부는 지난주 만기인 채권 이자 4억 달러어치에 대해서도 이미 지급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어떠한 채권도 루블화로 채권을 갚을 수 있는 조항이 없다고 블룸버그는 지적했다.
서방국가는 주요 7개국(G7)을 중심으로 대러 제재 강화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보란 듯이 이날 G7 정상회의 개막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공격하는가 하면, 격전지인 우크라이나 루한스크주 세베로도네츠크를 완전히 해방했다는 긴급성명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