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영 국제경제부 차장
감정을 조절했지만, 메르켈의 속내는 이보다 복잡했을 것이다. 자신이 밀어붙여 완공한 러-독 연결 가스관 ‘노르트스트림’이 자국의 숨통을 조이고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몽니로 가스공급이 중단되면서 독일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처지가 됐다.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경고한 대로 ‘멋진 신세계’에 진입했다.
메르켈은 억울할지 몰라도 노르트스트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빌미가 됐다. 노르트스트림이 생기기 이전, 우크라이나는 에너지 수출로 먹고사는 러시아가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상대였다. 러시아가 유럽에 보내는 가스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에 묻힌 가스관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도 수틀리면 가스관을 잠그거나 파괴하겠다고 러시아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1년 노르트스트림1에 이어 2021년 노르트스트림2가 완공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러시아 서부 연안에서 발트해를 거쳐 독일로 연결되는 노르트스트림1·2가 우크라이나 경유 가스관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러시아가 노르트스트림2 완공 직후부터 우크라이나 국경에 15만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니다.
푸틴이 설계하고 메르켈이 주도한 노르트스트림 프로젝트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악몽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비상조치를 발령했고, 프랑스는 전력공사 국유화에 나섰다.
정부의 안간힘에도 여론은 악화일로다. ‘침입자’ 러시아를 떠올리며 무섭게 뛴 에너지 가격을 꾸역꾸역 감내하던 유럽 내부는 슬슬 들끓고 있다. 지난달 유럽외교관계위원회(ECFR)가 유럽 10개국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참여자의 35%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영토를 양보해서라도 전쟁이 끝나길 바란다고 답했다. 말이 좋아 ‘평화 지지’ 세력이지, 일단 살고 보자는 얘기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는 와중에 선거를 치른 국가에서 ‘친러파’들이 약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에서는 푸틴을 ‘존경’하는 극우파 정치인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RN)이 지난달 치러진 총선에서 원내 제2야당으로 대약진했다. 헝가리의 ‘리틀 푸틴’이라 불린 빅토르 오르반 총리도 4연임에 성공했다.
정치는 생물이다. 달리 말하면 정치인의 줏대는 여론 앞에서 갈대와 같다. 움직이는 유럽 민심을 따라 정치권도 뒷걸음질 치기 쉽다. 러시아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 당장 목마름은 해갈될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란 게 있다.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석탄 시대로 회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리 급해도 인류 생존을 담보로 하는 건 가야 할 방향이 아니다. 러시아의 에너지 위협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내 목숨을 인질로 삼은 범죄자에게 또다시 생명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유럽에서 에너지 파고는 언젠가 닥칠 일이었다. 작년 7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1990년 대비 50% 줄이는 내용의 입법 패키지 ‘핏 포 55’를 발표했다. 탄소배출량 감축은 소비 절감과 에너지 전환에 따른 비용 상승을 수반한다. 일정 수준 희생이 불가피한 것이다.
예기치 못한 시점에, 의도치 않은 일로 고통이 닥쳤지만 지금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미래가 달렸다. 메르켈의 17년 전 결정이 러시아에 독일의 목줄을 내줬다는 걸 곱씹어야 한다. 0jung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