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가스 배출량 적고 탄소감축 목표 높이고…‘기후위기 대응에 부합하나’가 투자 기준
지난해 3월 1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럽중앙은행(ECB) 건물 앞. 43층의 쌍둥이 은행 건물을 지나 바로 앞 프레스센터로 두 명의 패러글라이더들이 날아들었다. 이들은 센터 옥상 위에 착륙한 뒤 노란색의 대형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지금 당장 기후위기에 대응하라’는 플래카드와 함께 또 다른 현수막에는 글 첫머리에 인용된 문구가 선명하게 보였다. 환경단체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ECB에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책을 촉구한 이색적인 시위였다.
이들의 요구는 명확했다. ECB는 양적완화 정책을 실행해 국채와 회사채를 대규모로 사들여 시중에 돈을 풀었다. 그런데 구입한 상당수의 회사채가 에너지 기업들이었다. 그린피스는 중앙은행에 이런 회사채 매입을 중단하고 유럽연합(EU)의 그린딜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패러글라이딩 시위 이후 넉 달이 지난 그해 7월 ECB는 전략재검토를 발표해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2019년 11월 취임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1년 반 동안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청취해 중앙은행의 업무를 재검토했다. 이후 ECB는 기준금리 조정과 양적완화와 같은 기존의 정책은 물론이고 기후위기 대응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나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보다 훨씬 앞선 행보이다.
10월부터 친환경 기업에 주로 투자
먼저 10월부터 만기가 도래한 보유 회사채의 원금을 온실가스 배출량이 적고, 탄소 감축 목표를 높이 설정한, 기후변화 관련 공시를 제대로 하는 기업의 회사채에 주로 재투자한다. ECB는 재투자를 결정할 때 기업의 과거 탄소배출 실적, 탄소배출 감축 목표, 관련 공시 자료 등을 점검한다.
유럽중앙은행은 2015년 3월부터 양적완화 정책을 실행했고 지난 1일에 중단했다. 7년 4개월간의 정책으로 ECB는 4조9500억 유로(약 6430조 원)어치의 자산을 매입했다. 대부분은 EU 회원국의 국채이고 이 가운데 8% 정도, 3860억 유로가 회사채이다.
ECB가 보유한 3860억 유로의 회사채 가운데 만기가 되는 회사채는 앞으로 몇 년간 한 해에 평균 300억 유로(약 40조7000억 원) 정도이다. 얼마 되지 않는 규모이지만 시장에 던지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중앙은행이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하는 기업들의 회사채를 우대하겠다는 것이다. 기후위기 관련 공시 기준을 충족하는 회사채만 담보로 받는다.
유럽중앙은행은 지난 4일 보도자료에서 앞으로의 추가 계획도 발표했다. 기업들은 투자자들에게 환경, 사회적, 거버너스(ESG), 이사회의 다양성 등을 공시해야 한다. ECB는 ESG 공시가 적정한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의 회사채만을 담보로 받는다. 관련 법규의 준비가 필요해 2024년 말부터 이런 기준이 적용된다. ECB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와 무디스 등의 신용평가회사에 기업을 평가할 때 기후 리스크 평가를 더 투명하고 적극적으로 할 것을 요구하겠다고 설명했다.
중앙銀 정책, 시장에 방향성 제시
전문가들은 ECB의 이런 정책이 시장에 확실한 방향을 주고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한다. ‘인류세채권연구소’의 울프 에란드슨 연구원은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ECB는 온실가스 과다 배출 기업들의 자금 조달을 점차 까다롭게 할 계획이다”라며 “무모한 투자자들만이 이 정책을 경시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중앙은행의 주어진 임무 안에서 기후변화를 통화정책 운영에 통합하는 구체적인 추가 정책을 실행 중이다”라며 “앞으로 관련 정책이 더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2015년 파리기후협약은 산업화 이전 수준과 대비해 지구 평균 온도를 섭씨 2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모든 나라들이 온실가스 배출을 단계적으로 줄이기로 규정했다. 이 협약을 준수하기 위해 유럽중앙은행도 동참했다.
“중앙은행 임무 벗어났다” 비판도
하지만 ECB의 이런 기후위기 정책에 대해 비판이 없지는 않다. 유럽의회 최대 원내교섭단체인 유럽인민당은 “중앙은행의 본 업무를 벗어나, 뒷문으로 업무 영역을 확대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ECB는 이에 대해 중앙은행의 첫 번째 임무는 물가안정이고 두 번째 임무는 EU의 경제정책 지원이라고 반박한다. 현재 EU는 2050년까지 세계 최초의 탄소 중립적인 대륙을 만들겠다는 그린딜을 야심 차게 추진 중이다. 일단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과 비교해 55% 줄인다는 법을 제정했다.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이 EU의 핵심 과제인데 이를 중앙은행이 지원하는 게 두 번째 임무에 상응하고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 반면에 그린피스는 ECB의 관련 정책이 너무 미미하다고 본다. 그린피스 금융 전문가인 모리치오 바가스는 “거대 화석연료 기업의 회사채를 매각하는 등 더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ECB는 양적완화정책에서 화석연료 기업의 회사채를 더 많이 매입했다. 온실가스 과다 배출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을 많이 한다. IT 기업들은 펀딩의 기회가 다양하기에 회사채보다 벤처캐피털이나 주식시장에 더 의존한다. 유럽중앙은행은 프랑스의 정유회사 토털이 발행한 163억 유로의 회사채를 사들였다. 그런데 토털은 동아프리카에서 석유 파이프라인을 건설 중이다. ECB가 이 회사채를 보유했기에 기후위기 대응을 거스르는 기업을 지원하는 셈이다.
美·英 중앙은행보다 한걸음 앞선 대응
그럼에도 ECB의 기후위기 정책은 다른 중앙은행보다 몇 걸음 앞섰다. 영란은행은 환경친화적인 기준을 충족한 기업의 회사채만 매입하겠다고 지난해에 발표했다. ECB와 비교해 그 규모가 작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페드)는 아직까지 기후위기 대응책을 내놓지 않았다. 미 공화당 의원들은 전 재무부 부장관 출신의 사라 블룸 라스킨의 페드 이사 임명을 거부했다. 라스킨은 페드가 기후위기 대응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결국 지난 3월 중순 청문회 도중에 자진 사퇴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페드도 기후위기 대응에 동참하기를 원하지만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인사가 많은 공화당이 이를 저지했다.
중앙은행의 기후위기 대응을 지켜보는 우리는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EU는 그린딜을 발표하며 새로운 성장 모델을 채택한다고 밝혔다. 환경을 보호하는 성장으로 일자리와 기술혁신을 주도하겠다는 방침이다. EU기구나 회원국 그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지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유럽중앙은행의 기후위기 대응은 그린딜 목표 달성 노력이 EU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지속됨을 보여준다.
택소노미 원전, 한국은 기준 못 미쳐
유럽의회는 지난 6일 격론 끝에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친환경으로 분류하는 데 합의했다(녹색분류체계·택소노미). 엄격한 안정성 유지를 조건으로 하는 과도기적 조치이다. 우리의 원자력발전소는 현재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아전인수격의 해석이 아닌 국제사회의 친환경 정책에 보조를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