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자들의 왕’ 정보라 작가 “한국은 역사가 오래돼 이야기도 풍부”

입력 2022-08-1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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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 (아작)

책 ‘여자들의 왕’은 정보라 작가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The International Booker Prize) 최종 후보에 오른 뒤 처음으로 낸 소설집이다. ‘치열한 여자들의 환상적인 이야기’라는 카피가 붙은 이 책은 그간 남성 서사로 전해진 이야기를 여성 서사로 바꾼 판타지 소설집이다.

10일 이투데이와 서면으로 만난 정 작가는 이번 작품이 언론을 통해서 ‘여성주의 판타지’로 소개되는 데 대해 “수록된 작품들의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고 전투나 전쟁, 권력투쟁 같은 이야기도 여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여성주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번 소설집은 주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틀에 박힌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꾼 작품들을 모은 책이다. 이러한 시도가 갖는 의미에 대해 정 작가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전한 후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다 전쟁에 휩쓸리게 된다. 어떤 특정 집단만이 위기에 대항해 싸우고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은 손 놓고 위기가 해결되기만 기다리는 게 아닌데 역사가 자주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했고, 그런 서사 방식을 바꾸고 싶었다”고 꼬집었다.

표제작인 ‘여자들의 왕’은 여자들의 권력투쟁을 다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SBS에서 2000년대 초반에 방영된 사극 ‘여인천하’와 비슷한 점이 많다. 이에 대해 정 작가는 “‘여인천하’ 등의 사극은 특정 계급 출신인 아주 소수의 남성만이 공식적으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에 그 남성들의 뒤에 있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시대 여성들은 남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휘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자들의 왕’은 이런 구도를 바꾸어 여성들이 공식적으로 권력을 가질 수 있고 그래서 권력을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선택권도 가질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그렸다”며 “어떤 성별이든 일단은 살아남기를 갈망하고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갈 권리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다 같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정 작가의 문체는 건조하고 서늘하다. 그 건조하고 서늘한 가운데 아스라한 빛과 온기를 뿜어내는 듯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그는 “외국어 전공을 오래 해서 외국어로 책을 읽은 기간이 길었는데 잘 못 하는 외국어로 된 책을 읽으면 문장 의미부터 해석하고 감정이나 어감은 나중에야 전달받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을 내 모국어로 쓰면 건조하고 서늘하다가 나중에 감정이나 어감이 전달되는 순서로 진행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 문학의 열기가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정 작가는 “한국은 역사가 오래됐기 때문에 그만큼 이야기도 풍부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현재 한국은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있고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현대 한국 독자들은 전통이나 고전에 집착하지 않고 정보기술과 과학적 상상력에 매우 열려 있다”며 “독자들이 소재나 장르에 상관없이 재미있는 이야기에 개방적이기 때문에 작가로서도 그런 추세를 따라가게 되므로 신선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정 작가와의 일문일답.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The International Booker Prize) 최종 후보에 오른 뒤 처음으로 낸 소설집이다. 부담이 컸을 것 같은데, 소감이 궁금하다.

“실제로 ‘여자들의 왕’에 실린 이야기들은 2010년을 전후해서 쓴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다. 표제작 ‘여자들의 왕’이 가장 최근 작품으로 2019년경 집필했고, 가장 오래된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2008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썼다. 출판사에서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이전 작품들을 모아서 새로 냈는데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상당히 부끄럽다.”

△이번 소설집을 ‘여성주의 판타지’로 소개하는 곳이 많은데 동의하는지.

“수록된 작품들의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고 전투나 전쟁, 권력투쟁 같은 이야기도 여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여성주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자들의 왕’이나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에서 권력이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승계되는 국가체계를 기반으로 묘사했는데, 그런 국가체계 자체가 현재 사회에서는 판타지이므로 여성주의적이지만 그냥 판타지다.”

△이번 소설집에 대해 “주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틀에 박힌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꾼 작품들을 모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시도가 갖는 의미나 의의 등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환란이나 위기를 겪으면서 생존해 왔다.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위기는 특정 성별, 특정 연령대, 특정 계층만 겪는 일이 아니다. 특히 전쟁이나 내란 등 군사적인 위기의 경우에 역사적으로 남성들은 군대에 가서 싸우고 여성과 아이들은 집을 지키며 안전한 후방에 남아 있었던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한국전쟁의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남의 나라에 파병 가는 경우가 아니라 자기 나라가 침공당해 전쟁이 일어나면 ‘안전한 후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성별, 모든 연령대의 모든 사람이 다 전쟁에 휩쓸리게 된다. 어떤 특정 집단만이 위기에 대항해 싸우고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은 손 놓고 위기가 해결되기만 기다리는 게 아닌데 역사가 자주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런 서사 방식을 바꾸고 싶었다.”

△‘사막의 빛’은 한 여성의 로드무비(Road movie)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여행을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의 만남 혹은 충돌로 형상화하는 방식이 독특하면서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이 단편을 쓰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사막의 빛’은 2002년에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고 처음 구상했다. 2001년에 미국에서 9ㆍ11 테러가 일어나고 이슬람 문화권 전체를 악마화하는 관점들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굉장히 우려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정교) 국가 출신 주인공이 불교 국가(고려) 출신의 소년과 이슬람 국가에서 만나는 종교와 문화의 첫 만남을 일부러 평화롭고 아름답게 그리고 싶었다. 우즈베키스탄 여행은 짧았지만 이후 석박사 과정에서 구소련이었던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특히 ‘고려인’으로 불리는 한인들의 역사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의 실용적이고 너그러우면서 아름다운 이슬람 바탕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표제작인 ‘여자들의 왕’을 읽고, 다소 뜬금없지만 SBS에서 2000년대 초반에 방영된 사극 ‘여인천하’가 떠올랐다. 여자들의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묘하게 비슷했다.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의 권력투쟁 서사가 갖는 재미나 가치 등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여인천하’ 등의 사극은 특정 계급 출신인 아주 소수의 남성만이 공식적으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에 그 남성들의 뒤에 있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런 시대 여성들은 남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휘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자들의 왕’은 이런 구도를 바꾸어 여성들이 공식적으로 권력을 가질 수 있고 그래서 권력을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선택권도 가질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그렸다. 어떤 성별이든 일단은 살아남기를 갈망하고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갈 권리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다 같을 것으로 생각한다.”

△흡혈귀 이야기를 다룬 ‘어두운 입맞춤’ 역시 흥미로웠다. 이 작품에서 여성을 비인간으로 형상화한 것에 대해 “여성이 귀신이나 괴물이 되어야만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대부분의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이 분노하거나 저항하거나 자기 의견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젊은 여성이 분노하거나 저항하면 나이와 권력으로 억누르려 하고 나이든 여성이 분노하거나 저항하면 무시하거나 조롱한다. 조선시대 서사에 처녀귀신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젊은 여성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죽지 않고 살아서 그 부당함을 호소하고 정의를 구현할 사회적인 체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여성은 죽어서 귀신이 되거나, 괴물이나 미치광이가 되지 않으면 분노하거나 저항할 수 없으며,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여성은 미치광이나 괴물로 취급받게 된다.”

△대체로 문체가 건조하고 서늘하다. 그 건조하고 서늘한 가운데 아스라한 빛과 온기를 뿜어내는 듯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작가가 혹시 있다면 누구인가.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페트루셰프스카야,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미국의 호러 거장 스티븐 킹을 좋아하지만 누구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외국어 전공을 오래 해서 외국어로 책을 읽은 기간이 길었는데 잘 못 하는 외국어로 책을 읽으면 문장 의미부터 해석하고 감정이나 어감은 나중에야 전달받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을 내 모국어로 쓰면 건조하고 서늘하다가 나중에 감정이나 어감이 전달되는 순서로 진행되는 것 같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는 시간 속에서 지워진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는 평등하다”고 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줄 수 있나.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 어떤 역사적 사건을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기승전결로 쭉 설명해 주시던 역사 선생님을 한 분 정도는 누구나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따르면 역사는 이미 일어난 이야기이고 문학은 일어날 가능성(개연성)이 있었던 이야기다. 장 보드리야르 이론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포함된 에세이에도 ‘역사는 과거형 시나리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다채로운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만들 때 가장 잘 팔릴 만한 요소들만 뽑아서 가장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역사는 이미 일어난 일이라서 아주 깔끔하게 말이 되는 기승전결로 정리할 수 있다. 게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 그 사건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 사망하고 나면 그렇게 깔끔한 기승전결 정리에 대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직접 겪었다’고 말해줄 사람이 남지 않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나 컴퓨터 게임이 엔터테인먼트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사례들을 보면 역사도 시간이 흐르면 그냥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 문학의 열기가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한국 문학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한국은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이야기도 풍부하다. 신화적, 전설적 상상력도 풍부하지만 또 최근의 역사적 비극에 대한 공감이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문학에 서슴없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재 한국은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있고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현대 한국 독자들은 전통이나 고전에 집착하지 않고 정보기술과 과학적 상상력에 매우 열려 있다. 독자들이 소재나 장르에 상관없이 재미있는 이야기에 개방적이기 때문에 작가로서도 그런 추세를 따라가게 되므로 신선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전혜진 작가의 ‘여성, 귀신이 되다’를 읽었다. 그리고 지금은 번역 중인 폴란드 SF를 가장 열심히 읽고 있다.”

△다음 작품의 주제나 소재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줄 수 있는지.

“재작년에 결혼하고 나서 포항으로 이주하여 해양수산물 3부작 문어, 대게, 상어를 썼다. 3부작 마지막 단편인 상어는 바로 얼마 전에 완성했는데, 남편이 포항하면 고래라고 고래도 쓰라고 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전복이나 오징어 등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해산물 얘기를 써달라고 해서 대체로 포항을 배경으로 하는 해양수산물 SF를 좀 더 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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