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다 보니 11년이 흘렀다. 천재적인 음악성을 지녔지만 자폐장애인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피아니스트 은성호 씨, 모든 인생을 걸어 큰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엄마 손민서 씨, 그리고 두 모자의 특별한 관계를 영 못마땅해하는 비장애인 둘째 아들 은건기 씨까지 세 명의 가족을 오랜 시간 지켜본 다큐멘터리 ‘녹턴’이 18일부터 관객과 만난다. 타인의 내밀한 가정사에 무려 11년 동안 카메라를 들이댄 집념의 결과물을 선보이는 정관조 감독과 개봉 당일 서울 명동에서 만나 그 길고 특별한 여정을 전해 들었다.
정 감독과 은성호 씨 가족의 첫 만남은 2008년 6월 KBS에서 방영된 ‘휴먼다큐 사미인곡’을 통해 이뤄졌다. 정 감독은 "(은)성호의 맑고 순수한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들에게 성호의 잠재력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은성호 씨와의 소통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영화 한 편을 보거나 글 한 편을 읽어도 줄거리를 전혀 모른다. 추상적인 사고 능력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아 대화가 잘 안됐다"고 했다. 대신 "지하철 노선도를 순서대로 외우고, 본 영화 제목만 3만 개를 쓰는 등 데이터베이스를 좋아했다. 음악도 (음계를 읽고 계산해 연주한다는 점에서)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촬영 당시를 돌이켰다.
은성호 씨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던 정 감독이 다시 카메라를 든 건 2013년 은성호 씨 동생 은건기 씨를 만나면서다. 형을 무시하고 엄마를 미워하던 그는 당시 가출 상태였다고 한다.
"집을 나와서 너무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는데, 좀 보듬어주고 싶었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저를 많이 따르고 믿었거든요. 물론 촬영하는 동안 제 애를 너무 많이 먹이기도 했죠. 기분 좋으면 촬영하고, 안 좋으면 안 하고… '녹턴' 포스터도 찍으러 안 왔어요."
장편 다큐멘터리 '녹턴'은 은건기 씨의 분량으로 입체성을 확보한다. 천재적인 음악성을 지닌 자폐장애인 형 은성호 씨의 성공기를 다루는 단순한 접근을 넘어, 그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경험하는 지난한 현실을 함께 다루는 까닭이다. 특히 비장애인 형제인 은건기 씨가 느끼는 소외감과 불만, 보호자인 엄마가 죽고 난 뒤 자신이 그 책임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부담감 등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건기 표현대로 말하면 '형은 엄마가 키우고 있는 아바타 캐릭터'예요. 바이올린, 클라리넷, 피아노 같은 비싼 아이템을 장착해주죠. 그런데 플레이어인 엄마가 죽고 나면 그 아바타의 아이템은 누군가에게 강도당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엄마가 헛수고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행 가이드 생활을 하며 해외를 유랑하는 은건기 씨는 그럼에도 가족들과 완전히 연을 끊지는 않는다. 때문에 자폐장애인 가족 구성원을 대하는 엄마와 동생의 어떤 입장 차이가 더욱 가감 없이 표출된다.
"건기는 도대체 왜 집을 자꾸 들락날락할까요. 그냥 집을 나가서 인연 끊고 살면 되는데요. 문제는 건기가 엄마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거죠. 출국하기 전에는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러 옵니다. 그런 엄마를 형에게 완전히 빼앗겼으니 미움도 서운함도 클 수밖에 없었겠죠."
이같은 내용은 2018년 '서번트 성호를 부탁해'라는 제목의 SBS 2부작 방송다큐멘터리로 일부 공개됐다. 촬영 기간이 너무 길어지자 사비를 털어 제작비를 마련하는 데 한계가 생겼고, 각종 방송 지원금을 받은 대신 일부 분량을 방영권 판매 형태로 공개했다.
"그때 영화 '녹턴'의 약 30% 정도가 공개됐어요. 촬영 기간이 11년에 달하다 보니 양이 워낙 방대해요. 최종 편집본을 7시간짜리, 5시간짜리로 점점 줄이면서 좋은 장면도 많이 잘랐습니다."
'녹턴' 말미에는 은건기 씨가 형의 러시아 공연 길에 동행하는 여정이 담긴다.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리허설 때 생기는 예상치 못한 문제도 직접 나서서 해결해준다. 어떤 연유로 그에게 마음의 변화가 생긴 건지, 영화는 콕 짚어 말하지 않는다. 다만 "똑같은 일상을 모으니 크고 묵직한 힘을 발휘된 것"이라는 정 감독의 말처럼, 시간의 흐름 사이에 녹아 든 일련의 감정 변화가 자연스럽게 감지될 뿐이다.
"인류 최대의 난제가 가족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겉으로는 미워하는 것 같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가족 아닌가 싶어요. '녹턴'은 그중에서도 최선의 힘을 다해 살아가려는 가족의 이야기죠. 제 황금 같은 10년을 들였지만, 아깝지 않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