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지난달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5년 발령한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며 민사상 불법행위이므로 국가가 당시 체포·처벌·구금된 피해자에게 배상 책임을 진다고 판단했다. 다만, 긴급조치 9호를 적용해 판결을 내린 법관 개개인의 책임은 판단하지 않았다. 당시 체포·처벌·구금을 시행한 공무원의 전체적인 행동이 위헌이므로 법관 개인의 책임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3일 이투데이와 만난 피해자 측 대리인 김형태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법관의 책임을 따질 것도 없이 '일련의 행위가 위법하다'는 것은 매우 비겁한 판단"이라며 "나쁘게 말하면 책임지기 싫어서 도망가 버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변호사는 보도연맹·인혁당사건·여순사건 등 다수의 과거사 재판에서 피해자 측에 서왔다.
김 변호사는 대법원의 이 같은 판단은 민법과 국가배상법의 규정이 다른 데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민법은 고의·과실에 의한 행위가 법에 어긋난 경우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본다. 행동 자체가 법에 어긋나는지만 따지면 된다. 반면 국가배상법은 고의·과실로 법령을 위반했고, 그 행동이 손해를 입혔을 경우 손해를 배상하라고 말한다. 법령을 위반할 때 '법적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인식했는지'가 쟁점이 되는 것이다.
이어 김 변호사는 "양승태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에 따른 법관의 행동이 법령을 위반했을 수는 있지만, 고의·과실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해배상의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단은 개별 법관의 고의·과실을 인정하면 앞으로 재판 결과를 두고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어 판단 자체를 안하고, 국가의 모든 행위를 묶어서 책임을 물어버린 것이라고도 봤다.
김 변호사는 "국가배상법도 민법처럼 손해배상책임을 따지면 되는데 조문을 다르게 해 놔서 어휘 하나에 매달리게 된 것"이라며 법을 손보든지, 위법성을 따질 때 과거사에 대해서는 예외로 본다고 단서를 달아 해석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승태 대법원 판단 이후 많은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에서 패소했다. 김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민주화보상법과 관련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다 '얻어걸린' 것이라고 평했다.
대법원의 판례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소송에 대한 재심을 청구할 수는 없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 소송에서 패소한 이들은 피해를 구제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특별법을 제정해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특별법에는 양승태 대법원 시절 잘못 만들어진 규칙을 바로잡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도 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과거사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액을 지급할 때 지난 이자는 지급하지 않고 판결 이후의 이자만 지급하도록 했다. 민법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안 지 3년 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양승태 대법원은 과거사 사건에 한해 6개월 이내로 기간을 줄였다. 일부 피해자들이 이를 알지 못한 채 소송을 제기해 손해배상을 받지 못했다.
법원이 인권을 탄압하는 법률·행정부의 결정에 기초해 내린 판단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미래의 사법 정의를 기대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