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전 세계적 민주주의 퇴행 추세는 중남미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중남미에서는 2000년대 후반부터 민주주의 후퇴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과 비교하면 현재 역내 자유 국가의 숫자는 감소했고, 부분 자유 국가와 비 자유 국가의 숫자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의 여파로 현재 중남미 18개국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부분 자유 또는 비 자유 체제에서 생활하고 있다. 프리덤하우스의 체제 분류 자료와 세계은행(World Bank)이 제공하는 인구 자료를 결합해 계산한 결과다.
민주주의 후퇴는 당연히 어느 국가에서나 큰 문제이지만,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대부분인 중남미에선 더 큰 문제다.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속도가 오랜 기간에 걸쳐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선진국과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남미에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규정한 ‘제3의 민주화 물결’에 힘입어 민주주의 이행에 성공한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많다.
선진국에서는 시민사회와 언론이 민주주의 원칙을 공격하는 집권세력을 견제해 민주주의 퇴행 속도를 늦추거나 민주주의가 회복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가 충분히 공고화되지 못한 신생 민주주의에서는 집권세력의 비민주주의적 행태가 효과적으로 견제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15여 년간 역내 많은 국가에서 관찰되어 온 집권세력의 권위주의적 행태가 특히 우려되는 이유다.
중남미 민주주의가 최근 15여 년간 전례 없이 후퇴하는 와중에 코로나19라는 예기치 않은 외부 충격이 중남미를 덮친 점은 뼈아프다. 첫째, 감염병의 발생으로 말미암아 역내 권위주의 정권과 권위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정권에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행정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구실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2010년대 초반 상품 붐(commodity boom)이 사그라들며 시작된 역내 국가의 저성장 추세가 코로나19의 여파로 강화되며 만성적인 빈곤과 불평등 문제가 더욱 불거졌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구실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해 시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했고, 주요 야당 지도자, 언론인, 분야별 전문가 등 정치적 반대세력을 국가의 코로나19 대응에 혼란을 주었다는 구실로 잡아들였다. 엘살바도르에서도 방역 조치 집행 과정에서 살인, 폭력 등을 포함하는 공권력의 시민 기본권 침해 사례가 다수 보고되었다. 이와 반대로, 멕시코와 브라질 정부는 감염병 확산의 심각성을 정부 차원에서 부정하고 관련 정보를 제한함으로써 행정부 권한 강화를 꾀했다. 코로나19 방역 조치가 정부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지지하는 세력의 결속을 해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빈곤 및 분배 지표의 악화는 필연적으로 유권자의 불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2010년대 후반 중남미에서 도미노처럼 발생했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팬데믹이 찾아오며 잠시 잠잠해졌지만, 유권자의 불만도 함께 잠잠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역내 대부분 국가에서 기성 정치 세력이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유권자가 납득할만한 해결책을 여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의 불만은 언제든 다시 거리에서 분출될 수 있다.
기성 정치 세력과 현행 정치 제도가 무능하다고 느낄 때, 유권자는 기존 민주주의 제도를 부정하고 기득권층을 비난하며 자신만이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포퓰리스트에게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칠레의 여론조사기관 라티노바로메트로(Latinobarómetro)가 2020년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는 최근 중남미 많은 국가에서 포퓰리즘이 더욱 확산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정부가 최선의 정치 체제라고 생각하는 설문 응답자의 비율이 전체 응답자의 절반을 넘은 중남미 국가가 18개국 중 11개국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팬데믹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가운데, 중남미의 민주주의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