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근로자의 ‘고의’ 가해 행위는 산재보험 책임”
근로자가 직장 동료의 고의로 업무상 재해를 입어 산재보험금이 지급됐더라도 근로복지공단이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근로복지공단이 성희롱·성추행 가해자 A 씨를 상대로 낸 구상금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4일 밝혔다.
A 씨는 직장 후배인 B 씨를 2년여에 걸쳐 지속해서 성희롱·성추행했다. 피해자 B 씨는 2017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이듬해 B 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유족에게 유족급여 등 모두 1억5000여만원을 우선 지급한 뒤 A 씨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현행 산재보험법은 근로복지공단이 제3자의 행위에 따른 재해로 보험급여를 지급했다면 원인 제공을 한 제3자를 상대로 피해자 대신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가해자 A 씨를 ‘제3자’로 볼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A 씨는 ‘동일한 사업주에 의해 고용된 동료 근로자’로 제3자 범주에서 제외한다는 2004년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들면서, 근로복지공단이 자신에게서 돈을 받아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심과 2심은 근로복지공단의 손을 들었다. A 씨의 가해 행위처럼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큰 경우에는 동료 근로자라 할지라도 궁극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사회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A 씨가 든 대법원 판례는 ‘고의’로 재해 사고를 일으킨 동료 근로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판단도 내놨다.
반면 대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이 A 씨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동료 근로자에 의한 가해 행위로 다른 근로자가 재해를 입어 업무상 재해가 인정되는 경우, 그 가해 행위는 사업장이 갖는 하나의 위험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그 위험이 현실화해 발생한 업무상 재해에 대해서는 근로복지공단이 궁극적인 보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산업재해보상보험의 사회보험적·책임보험적 성격에 부합한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은 2004년 대법원 판례를 더 구체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대법원은 청소 중 불을 내 동료에게 화상을 입힌 근로자 사건에서 고의·과실을 따지지 않은 채 가해자를 근로복지공단 구상 대상인 ‘제3자’에서 제외했다. 이번에 나온 대법원 판결은 ‘고의’로 인한 가해 행위에도 이런 법리가 적용됨을 분명히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구상 제도는 가해자 처벌·응징을 위한 제도가 아니고, 1·2심이 근거로 든 사회적 비난 가능성의 기준도 모호해 예외를 인정할 경우 오히려 산재보험의 법적 안정성을 해할 수 있다”며 “이런 사정을 감안해 기존 판례 법리를 유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은 근로복지공단이 가해자 A 씨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지만, 피해자 B 씨의 유족이 A 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지는 명시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판결 취지상 피해 근로자 역시 산재급여금 상당의 손해에 대해서는 가해 동료 근로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받은 산재급여금을 넘어선 손해에 대해서만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