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당국과의 길고도 지난한 싸움에
‘공공어린이재활병원’ 건립 10곳 선정
하지만 내년 필수인력 인건비 예산 ‘0원’
정부, ‘약자복지’ 약속 지켜야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이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아 다른 나라로 망명한 사람. 난민의 사전적 정의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우리 국민 중에서도, 그것도 나이가 아주 어린 난민이 있다. 바로 소아재활치료를 위해 전국을 떠도는 ‘어린이 재활 난민’이다.
뇌성마비가 있는 11살 딸의 재활치료를 위해 한 어머니는 원주에서 서울로, 또 한 번 서울에서 서울재활병원 근처로 이사를 거듭했다. 사실상 온 가족이 세 번이나 이사를 한 것이다. 그 고생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아이가 걸어서 학교에 갈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데 꾸준한 재활 덕분에 걸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라고 기뻐하셨다.
이 작은 희망을 찾아 기꺼이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옮는 이들,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 아닌 이별을 택하는 이들, 이 모든 가슴 아픈 사연이 모인 구호가 ‘공공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이었다.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때, 문재인 후보는 ‘전국 권역별 공공어린이재활병원 건립 및 설치’를 공약했고 당선 후 곧바로 국정과제로 추진했다. 소위 돈벌이가 되지 않은 소아재활치료에 민간이 나서질 않으니, 국가가 나서서 재활의료서비스를 담당하겠다는 취지였다. 2018년부터 대전을 시작으로 전국에 병원과 센터 10곳을 만들기로 했다.
포부는 원대했으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아이를 치료할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에서 정부가 아무리 공모를 해도 선뜻 손을 들고 나설 병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지부진한 사업 추진 상황을 타개하고자 공공어린이재활병원 설치 및 운영비 지원에 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장애인건강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토론회를 열었고, 의원 모임을 만들었고, 정부의 ‘예산 확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토록 재정당국과의 길고도 지난한 싸움에서 결국 ‘어린이 재활난민’은 승리했다. 정부는 적정한 전담인력 확보와 재활 체육, 가족지원 프로그램 운영 등의 여러 조건을 요구하며 공공어린이재활병원으로 지정된 병원에게 향후 3년 동안 필수인력 인건비를 직접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지난해 수도권에서 서울재활병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두 곳이 공공어린이재활병원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한숨이 트이겠다’라는 기대는 잠시였다. 2021년 첫 지정 이후 3년째인 내년도 필수인력 인건비 지원 예산이 ‘0원’으로 전액 삭감된 것이다. 긴축재정 기조를 강조하면서도 ‘약자복지’를 대대적으로 공언했던 윤석열 정부였기에 배신감도 더 컸다.
보건복지부 국정감사에서, 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과정에서 재활치료가 간절한 장애아동이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약자복지’의 ‘약자’가 아닌지 따졌다. 왜 당초 한 약속을 지키지 않냐고, 이제 누가 정부 말을 믿고 이런 사업에 뛰어들겠냐고 되물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저런 부분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부처 간의 실무협의 과정에서 건강보험 수가 적용 통해 지원하면 되지 않겠냐며 애초에 문제 제기가 강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하며 국회의 예산심사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설명대로라면 ‘다소 안일했던 기재부와 복지부 실무진들의 판단 착오’라는 것인데, 이렇게 ‘약자를 놓친 약자복지’가 어떻게 ‘약자복지’일 수 있겠는가.
정부의 번복된 약속으로 병원은 기껏 늘려놓은 필수인력을 유지할 인건비가 없어 당장 사람을 내보내야 할 상황에 처했고, 길게는 수년을 기다린 아이들이 재활치료를 위해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할 위기에 빠졌다. 수년에 걸쳐 쌓아온 공든 탑이 허무하게 무너진 셈이다. 약속은 지켜야만 약속이다. 윤석열 정부의 ‘약자복지’라는 구호가 공허한 헛말로 끝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