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첫 방송에 들어간 JTBC 금·토·일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장안의 화제입니다.
동명의 웹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재벌 총수 일가의 오너리스크를 관리하던 비서가 비리에 휘말려 살해당한 후 이 가문의 막내아들로 환생, 복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은 닐슨 코리아 조사 결과 방영 3회 만에 분당 최고 시청률 12.4%를 달성했습니다. 복수를 위한 치열한 암투를 그려내면서도 실제 역사와 적나라한 현실을 녹여낸 점이 특히 호평받고 있습니다.
작중 배경이 되는 ‘순양가’는 국내 재벌 가문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공 진도준(송중기 역)의 할아버지이자 순양 그룹의 창업자인 진양철(이성민 역) 회장은 금은방에서 금가루를 빼돌려 자본금을 마련합니다. 이 돈을 바탕으로 설탕 산업을 시작하고, 전자·물산·중공업·생명 산업을 중심으로 기업 규모를 키워나가죠.
이는 건어물 상회에서 시작해 제당, 모직산업을 영위하며 대기업으로 성장한 S그룹의 행보와 유사합니다. 반도체를 영위한다는 설정도 S 전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작중 순양그룹의 비서실장으로 등장하는 이항재(정희태 역)는 한때 S그룹의 2인자로 불리던 전(前) 부회장의 이름과 비슷합니다.
순양 그룹의 라이벌 격인 대현 그룹은 또한 H그룹과 유사하죠. 자동차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국내 대기업을 떠오르게 합니다. 순양 그룹이 현실 대기업을 반영했다면, 벌어지는 사건들은 현실 그 자체입니다. 주인공 도준은 미래가 된 역사를 활용해 고지를 선점해나가죠. 한국 현대사를 아는 시청자들은 역사와 함께 작품에 빠져듭니다.
과거로 회귀한 주인공은 순양 가문의 막내아들 도준이 되어 눈을 뜹니다. 진 회장이 대선 자금을 누구에게 댈지를 두고 고민하던 시점이죠.
진 회장은 차기 대통령 유력 후보인 DJ와 YS를 두고 고민하지만, 도준은 두 후보가 아닌 3위 후보에게 대선 자금을 대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니셜에서 짐작할 수 있듯, 두 후보는 실존 인물인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입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였던 두 사람은 1, 2위 후보였습니다. 하지만 민주정의당의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줘야 했죠.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음에도 단일화에 실패한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회귀자’인 도준은 이러한 역사를 알고 있으므로 순양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꿋꿋이 주장을 이어갑니다. 나아가 도준은 “1등 다음에는 2등과 3등도 1등이 될 기회를 얻을 것”이라며 DJ와 YS에게도 대선 자금을 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인물은 각각 제 13·14·15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장 회장은 이후 반도체 산업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품고 이라크 바그다드로 출장을 떠납니다. 도준은 진 회장이 탄 비행기가 테러로 추락할 것임을 기억해내고, 비행기 일정을 앞당기도록 유도하죠.
1987년 11월 발생한 칼(KAL)기 폭파 사건이 배경입니다. 대한항공(KAL) 858기가 북한 공작원 김현희 등에 의해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파되었던 일이죠. 북한이 한국 사회에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기획한 사건입니다.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방콕을 경유하는 서울행 비행기는 공중에서 폭파됩니다. 당시 탑승자 115명 전원이 사망했죠. 작중 장 회장 또한 이 폭파 사건에 휘말려 죽을 운명이었으나, 도준의 기지로 참사를 피합니다.
대학생이 된 도준은 ‘한도제철 인수’ 사건에 빠집니다. 한보철강 사태를 떠오르게 하죠.
한보 철강은 과도한 사업 확장으로 1997년 1월 부도가 났습니다. 불법 대출로 당진 제철소를 지었으나 경영 악화가 심화하며 끝내 도산에 이르렀죠. 재계 14위 그룹의 부도는 국제 통화 기금(IMF) 외환위기 발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한보철강은 2004년 현대그룹에 인수돼 ‘현대제철’로 사명을 변경합니다. 도준의 동업자가 한도제철을 인수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외에도 우리 사회를 알면 보이는 ‘깨알 포인트’가 많습니다.
도준은 진 회장이 낸 퀴즈를 맞히고, 상금 대신 분당 땅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1987년 분당은 풀과 저수지밖에 없는 황무지였죠. 이후 드라마 속 시간이 10년 이상 급전개되며, 도준이 매입한 땅은 어느덧 240억 원을 호가하는 ‘노른자 구역’이 됩니다.
도준이 배급을 추진한 영화들도 우리에게는 익숙합니다. ‘타이타닉’, ‘나홀로 집에’ 등 흥행작이 등장하죠.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와 사회의 단면을 속속들이 반영한 재치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미래를 아는 주인공의 거침없는 행보 뒤로 보이는 촘촘한 배경 때문에, 한국의 1980·90년대 근현대사를 알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판타지 회귀물’을 표방하면서도 초반부터 높은 시청률을 견인하는 데 성공한 건 이러한 작품의 치밀함 덕분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