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과 부수법안이 여야가 최초로 정기국회 회기까지 넘기며 지난한 협상을 벌인 끝에 합의됐다. 정부·여당은 헌정사 최초 준예산 사태, 야당은 윤석열 정부 첫 예산 발목잡기 비판 부담에 극적으로 합의한 것인데, 이처럼 서로 벼랑 끝에 서는 협상을 한 데에는 여야 의견차 외에 윤석열 대통령의 ‘버티기’가 작용했다.
주호영 국민의힘·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2일 예산안과 부수법안을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키로 합의했다. 쟁점이 됐던 내용은 서로 한 발짝씩 양보했다. 정부·여당의 행정안전부 경찰국과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예산은 절반으로 깎였고, 지역화폐 예산은 민주당 요구 규모의 절반만 반영한 것 등이다. 세제의 경우 법인세 1%포인트 인하로 접점을 찾았다.
내용만 보면 이미 앞선 협상 과정에서 제시됐던 바다. 그럼에도 난항을 겪었던 건 윤 대통령의 강경 태세 영향이다. 대표적으로 법인세 1%포인트 인하는 김진표 국회의장이 일찌감치 중재안으로 제시해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직접 수용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거부한 데 따라 여당에서 비토에 나섰던 것으로 파악됐다.
윤 대통령이 여소야대 상황임에도 무리하게 강경 태세를 보인 건 오히려 여소야대를 극복키 위한 것으로 읽힌다. 원만하게 협상할 경우 민주당이 과반 이상 의석을 가진 탓에 협상 내용과 상관없이 적당히 타협하며 끌려 다니는 그림으로 보이기 십상이고, 집권 첫 예산부터 국정 기조를 관철시키려는 모습을 보여야 지지층에 면이 서서다.
거기다 내년 2024년도 예산 협상에서는 오히려 타협의 여지를 만드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국회선진화법 제정 이래 처음으로 정기국회 회기를 넘긴 협상을 재연하지 않으려 하는 데다, 내후년 총선을 불과 4개월 앞둔 시점이라 지나친 정쟁은 서로 악재가 될 수 있어서다.
윤 대통령은 나아가 총선 표심에 호소하는 데 예산 합의를 활용하고 있다. 거대야당의 발목 잡기로 첫 예산부터 고초를 겪은 점을 부각시켜 여당의 보다 많은 의석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용산 대통령실은 여야 예산 합의에 대해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별다른 공식입장을 내지 않고 있으면서도, 주 원내대표는 물론 한덕수 국무총리와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물밑협상에 애썼다는 점을 귀띔하며 민주당에 대한 유감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