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현 칼럼] '너도나도 피해자'라는 놀라운 이야기

입력 2023-05-12 05:00수정 2023-05-1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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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주가 왜 올랐나” 주목하는 검찰과

“왜 내렸나” 초점 맞추는 라 대표

‘남의 눈에 피눈물’ 조언 되새기며

SG발 주가 조작 엄정히 단죄해야

일주일 넘게 출퇴근길에 3색 볼펜으로 밑줄을 치며 책 한 권을 읽고 있다. 출판가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다. 필력이 장난 아니다. 인생 경륜과 독서량도 장난 아니고….

이 베스트셀러의 필자는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의 시가 그렇게 싫었다고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그 유명한 시 말이다.

어린 시절 가난에 찌들어 산 필자는 “내 삶은 수제비로 범벅이 돼 있는데 슬퍼하지도 말고 노하지도 말라니”, 말이 되느냐고 반문한다. 어찌해야 말이 되나. 그는 “당신의 삶에 먼저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No!’라고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필명도 세이노(Say No)다.

세이노는 상당한 자산가다. 책에도 “부자가 되려면” 같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부자 되는 길의 필독서로 여길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세이노가 가리키는 길은 사람 되는 길이다.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기 위해 어찌 노력해야 하는지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향도 클 것이다.

세상은 넓고 부자는 많다. 세이노와 다른 유형의 부자도 많다. 개중에 유난히 꼴불견인 부류가 요즘 세간의 시선을 붙들고 있다.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에 연루된 부자들이다.

내로라하는 자산가가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고소득 전문직, 유명 연예인도 있다. 그런 이들이 얼핏 봐도 최소한 ‘추문’이고, 다단계 사기극이 아닌지 의심조차 드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돈 잃고 체면 잃는 이중고에 직면하고 있다. 참으로 딱하다.

이번 사태의 핵심인 라덕연 H투자컨설팅업체 대표 일당이 엊그제 체포됐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윤창현 의원은 사태 피해자가 7만2514명에 이르고 금전적 피해 규모는 7730억 원에 달한다는 추계를 내놨다. 정확한 추계인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정확한 추계가 가능한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사태 파문이 엄청난 규모라는 점이다. 선의의 피해자도, 눈물의 사연도 허다하다. 엄정한 수사와 단죄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태엔 독특한 관전 포인트가 있다. 모두 피해자를 자처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라 대표도 그렇다. 검찰 수사는 문제가 되는 8개 기업 주가가 얼마나 뻥튀기됐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라 대표 관점은 다르다. 최근 보유주식을 매도한 모 기업 대표와 외국계 헤지펀드의 도미노 폭락 책임을 부각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검찰은 ‘주가가 왜 올랐나’에, 라 대표 측은 ‘왜 내렸나’에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라 대표는 검찰에 체포되기에 앞서 보도진에게 시세 조정에 직간접 관여했다고 인정하는 인상을 줬다. ‘왜 내렸나’에 집중하면서 그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였다. 향후 법정 공방에 미칠 부작용도 별반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법적 처벌이 별로 걱정되지 않거나, 아니면 진짜 겁나는 것은 따로 있다는 뜻일 것이다.

미국은 유력계층 사기를 중형으로 다스리기 일쑤다.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을 지낸 버나드 메이도프에 대한 엄벌이 좋은 예다. 그는 초대형 ‘폰지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 2008년 들통나 쇠고랑을 찼다. 이듬해 법원은 150년 형을 선고했다. 메이도프는 2021년 교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사회의 ‘메이도프’는 어찌 되나. 설혹 실형 선고를 받더라도 상대적으로 짧은 수감생활 후에 집으로 돌아가 호의호식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자본시장에 복귀하기도 한다. 시장경제의 혜택을 가장 폭넓게 누리는 부류가 신뢰의 기반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구조인 것이다. 현실이 이러하니 걸핏하면 ‘유전무죄’를 외치는 함성이 터져나오고, 심지어 이번 국면에서도 사법절차 이후를 염두에 둔 ‘너도나도 피해자’ 타령이 퍼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세이노는 이른바 ‘갭투자’에 대한 의견을 누군가 묻자 단호히 답했다. “남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게 할 가능성이 있는 짓은 절대 하지 마라”고. 전세사기단만 귀담아들을 가르침이 아니다. ‘너도나도 피해자’라는 SG발 사태 책임자들도 규제 당국과 함께 깊이 되새겨야 한다. 사람 되는 길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더 늦기 전에 가늠해 보라는 준엄한 명령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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