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기마다 대대적 '1급 정리'…"유능한 사람 다 떠나"
“일찍 승진한 만큼, 일찍 집에 간다.”
행정직 5급 공개경쟁채용(행정고시) 출신 관료들은 대체로 공직수명이 짧다. 지난해 퇴직한 국가직(일반직) 고위공무원(1·2급) 271명 중 정년퇴직자와 임기만료자는 각각 25명, 40명이다. 나머진 정년·임기를 남기고 공복을 벗었다. 상당수는 중앙행정기관 실장급인 1급(관리관)이다.
2006년 1급과 국장급인 2급(이사관)을 하나의 인재풀로 통합관리하는 고위공무원단 제도가 도입됐으나, 여전히 1급은 2급의 상위직급으로 여겨진다. 제도적으론 실장에서 국장으로 전보도 가능하지만, 현실에선 사례를 찾기 힘들다. 1급 승진인사가 이뤄지면 기존 1급 보직자들은 무보직 초과현원이 된다. 이들의 선택은 의원면직이나 명예퇴직이다. 한 1급퇴직자는 “논리적으로 강제 해고라고 보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자발적 퇴직도 아니다”라며 “요즘엔 다음 자리를 준비하지 못한 젊은 고위공무원들이 버티는 사례가 늘었다고 하지만, 버틴다고 버텨지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1급 물갈이는 정권교체기나 국정지지도 하락기에 관행적으로 행해진다. 이때마다 쏟아지는 무보직 1급들은 짧게는 2~3년, 길게는 6~7년 정년을 남기고 ‘자의로 포장된 타의’로 공복을 벗는다. 1급은 고시 출신들에게도 값진 보상이지만, 모순적으로 공직의 끝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나마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경제부처 출신은 소속·산하기관 재취업을 도모할 수 있지만, 사회부처는 이조차 여의치 않다. 주로 대학이나 민간기업·단체 문을 두드린다.
◇만만한 게 1급…정권교체기마다 ‘물갈이’
1급 공무원의 고용 안정성은 ‘파리목숨’에 비유된다. 차관에 오르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정년을 남겨두고 공직을 떠난다. 특히 정권교체기엔 인적쇄신을 내세운 대대적 1급 물갈이가 단행된다. 인사혁신처와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에서 연간 169~183명이었던 의원면직·명예퇴직 고위공무원(국가직·일반직) 수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195명으로 늘었다. 이듬해부터 148~188명으로 줄었으나,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난해 204명으로 급증했다.
정권교체기엔 정책기조와 국정과제를 중심으로 조직·인사개편이 이뤄진다. 인사개편에서 가장 절대적인 기준은 ‘국정철학 공유’다. 자연스럽게 전 정권 승진자들은 배척된다. 문재인 정부 초 50대 중반에 공직에서 은퇴한 고위공무원은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반복되다 보니 정치가 행정부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커지는 것 같다”며 ”과거 정부에서 열심히 일한 공무원이 있다면 국정철학에 맞춰 그 공무원의 역할을 바꾸면 되는 것인데, 아예 배제하다 보니 공무원들은 더 소극적으로 보신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업무에 임할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권 중반 1급 물갈이가 이뤄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명분은 공직사회 분위기 쇄신이다.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이자 취임 3년차인 2010년 214명, 4년차인 2011년 229명을 의원면직·명예퇴직으로 내보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급 물갈이를 진행 중이다. 환경부에선 최근 1급 전원이 한화진 장관 지시로 사직서를 냈다. 고용노동부에선 지난해 8월부터 11개월간 본부·소속기관 1급 7명 중 6명이 교체됐다. 전반적으로 ‘코드’가 문제다.
이런 이유로 관가에선 ‘1급 대변인’을 놓고 속내가 복잡하다. 기획재정부 등 승진이 느린 부처에선 1급 신설이 인사적체 해소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엔 퇴직만 앞당겨져서다.
인위적인 1급 물갈이는 동전의 양면이다. 공직사회에 긴장감을 줘 공무원들의 적극성과 행정업무의 능률성을 높일 수 있지만,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인재만 유출된다. 한 사회부처 고위공무원은 “코드와 무관하게 능력을 인정받아 1급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1급을 내보내면 조직엔 유능한 사람이 남아나지 않는다”며 “전 정권에서 승진했다는 이유로 내쫓는 게 우수 인재를 확보하는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다시 변방으로’…2급도 가시방석
2급도 ‘물갈이’의 안전지대는 아니다. 신분은 보장되지만, 보직이동이 문제다. 정권에 따라 정책기조가 180도 바뀌는 부처에선 정권교체기 핵심 보직에 있던 2급들이 대거 변방으로 밀려난다. 3대 개혁과제 중 노동개혁과 교육개혁을 담당하는 고용노동부, 교육부가 대표적이다.
고용부에선 지난해 8월 노사협력정책관, 올해 5월 근로감독정책단장이 지방고용노동청장으로 전보됐다. 모두 노동개혁을 담당하는 국장급(2급) 자리다. 각각 노동단체 지원과 노사관계 법제, 임금·근로시간 정책을 총괄한다. 근로감독정책단은 노동개혁 총괄부서인 노동개혁정책관(국장급)이 신설되면서 아예 폐지됐다. 정권교체 직후 고용부의 국장급 이동은 일종의 관례다. 문재인 정부에선 박근혜 정부 노동개혁을 담당했던 근로기준정책관이 지방청으로 밀려났다. 이런 상황은 지방조직이 있는 다른 부처들도 마찬가지다. 국토교통부, 환경부가 그렇다.
모든 부처의 상황이 같은 건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 문재인 정부에서 승진한 1급 4명 중 1명만 공직을 떠났다. 오히려 2명은 차관으로 승진했으며, 1명은 대통령실 비서관으로 발탁됐다. 과거 정권에서도 복지부는 상대적으로 물갈이 규모가 작았다. 박근혜 정부 이후 복지정책 기조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데다, 관료들의 성향도 갈리지 않아서다.
일각에선 복지부가 물갈이를 피해간 배경으로 ‘심기경호’를 꼽는다. 지난해 복지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후 숱한 의혹에 시달리던 정호영 경북대학교병원 교수를 끝까지 보호했던 게 윤석열 대통령의 점수를 땄다는 관측이다. 관가 동향에 밝은 한 고위공무원은 “장관 후보자 의혹 방어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한 부처는 지금 1·2급뿐 아니라 3급(부이사관)들도 무더기로 대기발령 상태”라며 “대통령의 성향이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대가”라고 말했다.
모든 정권이 ‘능력중심’ 인사를 표방하지만, 현실은 능력중심과 거리가 멀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21년 공직생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적합한 업무에 배치되고 있다’는 문항에 동의하는(그렇다, 매우 그렇다) 공직자는 33.4%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