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미국인들이 부커상 후보에 오른 천명관 작가의 ‘고래’나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건? 두말할 것 없이 영번역이다. 본뜻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맥락과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현지인의 감수성에 충분히 가 닿을 수 있는 유려한 확장이 요구된다.
이 같은 한국문학 영번역 작업을 도맡아 온 이들 12명의 경험과 고민을 담은 신간 ‘K 문학의 탄생’이 출간됐다. 책을 공동기획한 이상빈 한국외대 영어대학 EICC학과 교수는 5일 본지에 “한국 문학이 세계적인 성과를 조금씩 내고 있는 성장의 배경에는 분명 번역의 역할이 있음에도 이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들며 출간 배경을 전했다.
‘K 문학의 탄생’은 흥행 영화로 제작될 만큼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번역한 제이미 장,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유명 시집 ‘패터슨’을 번역한 정은귀 등 12명의 번역가를 섭외해 완성한 책이다. ‘영번역’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각자의 실무 경험이 녹아든 개성 있는 원고를 취합하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첫 주자로 나선 건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과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 등 여성 주인공과 젠더 이슈를 다루는 작품을 주로 번역한 제이미 장 번역가다.
그는 ‘82년생 김지영’을 번역을 처음 의뢰받았을 당시 주인공과 자신의 나이, 성별, 태어난 곳이 같았기에 “식은 죽 먹기일 거라 생각했다”고 했지만, 세 차례나 책을 읽고도 “어째서 김지영이 정신병을 앓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제이미 장은 주인공 김지영과 자신의 경험이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기 위해 작성했던 연대기 표를 책에 실었다. 비교대조를 통해 미국과 덴마크 등지를 오가며 생활했던 자신과 달리 주인공이 평생 서울을, 한 회사를, 직장을, 가족을 떠나지 않은 채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 시간을 거쳐 그의 심리에 보다 가까이 선 채 번역할 수 있었음을 돌이킨다.
2021년 책 기획 당시 이 교수는 제이미 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자들과 일면식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인터넷이나 아는 분을 통해 이메일 주소를 구해서 책 기획 취지를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면서 ”번역가의 개인적 배경은 물론이고 번역했던 작품의 경향성과 특성을 모두 고려해 연락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을 거쳐 섭외한 또 한 명의 번역가가 윤고은 작가의 ‘밤의 여행자들’을 영어로 옮긴 리지 뷸러다. 그는 책에서 “번역은 재활용”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내세운다. 모든 필자 중 가장 짧은 분량의 원고를 실었지만 이 교수는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은 별로 없었기에 가장 임팩트 있는 이야기로 느껴졌다”고 했다.
리지 뷸러는 손쉽게 무시되는 번역가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번역이 그 자체로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창조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짚는다. 다만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탄생시켜 재사용하는 파생적인 행위”에도 분명한 가치는 있다. 그 자체로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라는 압박에 저항하는 한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시를 번역하는 과정의 고충을 다룬 대목은 특히 흥미롭다. 김이듬 시인의 시집 ‘히스테리아’에 실린 첫 번째 시 ‘사과 없어요’의 사례가 특히 그렇다.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 (후략)”
제이크 레빈, 서소은, 최혜지 등의 공동 작업을 거친 최종 번역은 이렇게 완성됐다.
“Shit. Wht’s this expensive dish? I dind’t order this. I said jjajangmyon, you know, simple noodles with black bean sauce? … (후략)”
‘아 어쩐다’가 ‘Shit’으로 옮겨진 걸 두고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는 “감정의 중립성보다는 시의 화자가 느끼는 난감함에 비중을 둔다”고 썼다. 그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는 당초 번역 ‘What to do?’를 ‘Shit’으로 바꾼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국 문학 번역에 얽힌 이토록 다채로운 이야기를 한 책에 모아 엮은 이 교수는 “최근들어 챗GPT를 비롯한 기계번역이 화두에 오르면서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번역을 ‘아주 간단한 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짚었다.
그럼에도 “문학 번역 만큼은 ‘인간의 글을 인간답게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전선’"이라면서 "그 과정을 통해 (해외에 읽히는) ‘K문학’이 탄생한다는 점을 생각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