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영합 정책은 보편복지로 타락
빈곤계층에 맞춘 선별복지가 해법
내년 4월에 총선이 있다. 정책사고와 국민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정치권의 포퓰리즘 준동을 막을 수 없다. ‘빈곤’과 ‘불평등’은 그 해결이 쉽지 않은 지난한 문제이다. 무엇이 더 해로운가
빈곤과 불평등은 문제의 ‘결’이 다르다. 빈곤은 ‘절대적 빈곤’, 불평등은 ‘상대적 빈곤’의 문제다. 빈곤은 ‘배고픔’의 문제이지만 불평등은 ‘배아픔’의 문제다. 문제의 포괄범위를 보면, 빈곤이 해소되면 불평등은 완화되지만 불평등이 완화되더라도 빈곤은 여전이 남아있기 쉽다. 불평등보다 빈곤이 더 큰 경제악(惡)인 이유다. 그럼에도 근래 우리 사회,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는 빈곤보다 불평등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의 본질을 천착해야 한다. 빈곤 개념은 명료하게 정의된다. 빈곤선 아래 인구비율을 줄이면 된다. ‘빈곤탈출’로 요약된다. 상대적 빈곤인 불평등 문제는 개선 정도를 정확히 계측할 수 없다. 그러려면 ‘적정한 불평등’ 상태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하지만 무엇이 적정한 불평등인지 규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이 해결되더라도 상대적 빈곤은 ‘그렇게 느끼는 문제’이기에 해결이 불가능하다.
자유주의 경제철학자 미제스(Mises)에 따르면, 소득은 ‘경제행위의 결과’로 얻어진 것으로 소득의 크기를 ‘당(當), 부당(不當)’으로 가치 판단해서는 안된다. 소득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선천적 능력과 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소득의 크고 작음에 ‘당과 부당’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든 개인의 소득이 같을 수는 없을 터이니 소득불평등은 저연스런 현상이다.
자신의 외모를, 자신의 부모를, 자신의 지능을 선택하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자기의지와 관계없이 ‘던져진 존재’(被投性)이기 때문이다. 미제스는 이를, ‘자연의 공장문’을 나오는 순간 다시는 같은 것을 두 번 다시 만들지 않는다는 도장이 찍힌 것으로 표현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 간 소득 차이가 작아지려면, 즉 불평등 정도가 작아지려면 능력과 운이 통계적으로 ‘부(負)의 상관관계’를 가져야 한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일수록 일과성(一過性) 운을 ‘기회로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원천적으로 인간의 소득은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좌파경제학자들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는 것이 ‘사회적 권리’로 인정되면, 개인의 출발선을 매번 미조정해야 하기 때문에 정부는 무한대의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평등사회가 요원한 것은 어렵게 ‘기회의 평등’을 실현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결과의 평등’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평등에 대해 적의(敵意)를 품을 필요가 없다. 사후적 개념으로서의 ‘불평등’이 과정에서의 ‘불공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극화’는 과장이다. 부유층 때문에 빈곤층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집의 김서방이 성공해서 뒷집의 박서방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상업세계에서 성공과 실패는 확률적으로 독립된 사건이다. ‘빈곤층 소득 대비 부유층 소득 배율’을 ‘악마의 숫자’로 몰고갈 이유는 없다. 질시(envy)를 부추길 뿐이다. 정책적 관심은 빈곤층에 주어져야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불평등 완화’라는 미명하에 ‘포퓰리즘’ 정치가 만연됐다. 대중이 반길 만한 것이면 무조건 ‘정책카트’에 담으려는 행태가 바로 인기영합 정책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선별적 복지’는 ‘보편적 복지’로 타락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푼돈 살포가 소득불평등 완화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내 삶은 내가 책임진다’는 각자 도생의 의지가 공유되어야 한다. 매정한 사회로 치닫자는 게 아니다. 상대적 빈곤 이슈에 함몰될수록 역설적으로 빈곤 탈출은 더 어려워진다. 지금까지의 사회복지 정책은 빈곤탈출이 아니라 ‘실패할 유인’을 자극해 빈곤에 안주하게 한 측면이 강했다.
보편적 복지는 빈곤계층에 초점이 맞춰진 ‘선별적 복지’로 자리매김해야 하고, 최선의 불평등 완화 정책은 ‘패자부활전을 통한 재기 기회 제공’인 것이다.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듯이 사회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야 한다. ‘배려와 자조정신’이 복지제도의 근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