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전장의 중심에 있는 이순신 보여주고 싶었다"
도요토미에서 시작, 광해군으로 끝나는 영화의 의미는?
12일 언론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노량: 죽음의 바다’는 ‘전쟁’과 ‘정치’에 관한 영화다. 전자가 타국의 권력을 획득하는 일이라면, 후자는 자국의 권력을 획득하는 일이다. 김한민 감독은 전쟁과 정치를 충돌시키면서 ‘이순신 3부작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전쟁과 정치는 어떻게 충돌하는가.
이순신은 왜적을 물리치면서 동시에 중앙 정치 세력으로부터 견제받았다. 실제로 그는 가토를 생포하라는 조정의 명을 거역했다가 죽을 뻔했다. 영화에서 적대적 공생 관계로 묘사되는 시마즈와 고니시의 관계도 그렇다. 영화는 노량이라는 공간에 외란(外亂)과 내란(內亂)을 접목해 아군도 적군도 없는 이전투구의 참상을 묘사한다.
우선 전쟁에 관해 말해보자. ‘노량’은 100분가량의 해상 전투 장면을 통해 전쟁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는 데 성공한다. 명군과 조선군, 왜군의 시점으로 이어지는 긴 호흡의 살육 장면은 전쟁영화의 쾌감과 그것을 마냥 즐길 수 없도록 하는 처연함까지 뿜어낸다.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등자룡(허준호)과 준사(김성규)의 존재감도 빛난다.
이제 정치에 관해 말해보자. 고니시(이무생)의 부하를 무참히 징벌하는 시마즈(백윤식)의 모습은 외란 속 내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본진이 위험에 처하자 자국의 선발대를 향해 무차별 포를 퍼붓는 시마즈의 모습은 이순신의 죽음보다 더 비극적이다. 고니시가 시마즈를 돕지 않고 회군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가 전쟁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노량’의 첫 장면은 이순신이 아닌 죽음을 앞둔 도요토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도요토미가 고개를 돌리자 음흉하게 웃는 도쿠가와의 모습이 포착된다. 이 장면만으로 재단하면, 적어도 영화에서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노량’이 묘파하고 싶었던 건 전쟁의 과정이 아니라 전쟁의 원인, 즉 정치였을지도 모른다.
알려진 것처럼 도요토미는 자신을 견제하는 국내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자국의 정치적 혼란을 전쟁을 통해 다스리려 했다. 그 유명한 정명가도(征明假道)는 사실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길을 마련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정적들을 견제하고 제거할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한 이유는 전쟁 이후 벌어질 자국의 정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호사가들의 얘기에는 아무런 역사적 증거가 없다. 영화에서 류성룡의 전갈을 받은 이순신이 “모두 전쟁 이후만 생각한다”며 한숨을 쉬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적 증거는 있는 셈이니까.
영화는 낮에 뜬 (아마도 이순신을 상징하는) 별을 바라보는 광해군의 모습을 뒤로하고 끝난다. 그런 점에서 ‘노량’은 도요토미에서 시작해 광해군으로 끝나는 영화다. 광해군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한 죄로 폐위됐다. 서인과 북인 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갈등의 희생양이었다.
이처럼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에 주인공인 이순신이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날 시사회에서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이 느끼는 고독함, 완전한 항복을 얻고자 하는 모습 등을 그리고 싶었다”며 “전장의 중심에 있는 이순신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순신은 정치가 아닌 전쟁의 중심에 있었다.
천만 관객 돌파가 예상되는 ‘서울의 봄’에 이어 연말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을 ‘노량’은 20일 극장에 정식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