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개선 논의 없이 자기면피
은행은 “허용 범위 안에서 판매”
전문가도 “분리운영 방안 필요”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의 대규모 손실이 임박한 가운데 금융당국이 은행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고위험·고난도 상품의 판매를 제도와 행정력으로 관리 감독해야 할 당국 역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17일 본지 취재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ELS 등 고위험 상품에 대한 불완전판매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에 대한 제도 개선 논의를 하지 않은 상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현재 실태 점검을 하고 있는 상황으로 문제점과 원인 진단이 나와야 개선 방안을 준비할 수 있다”면서 “지금 시점에서 판매 행위가 잘못됐다고 단정 짓고 개선 방안을 얘기하기에는 아직은 이른 감이 있다”고 말했다.
은행의 불완전판매가 확인되지 않은 만큼 제도 개선을 언급하기보다는 추후 사안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국은 은행들의 불완전판매 가능성을 의심하면서 연일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달 29일 “고위험·고난도 상품이 은행 창구에서 고령자들에게 특정 시기에 몰려 판매됐다”면서 “(은행들이) 묻기도 전에 무지성으로 소비자 피해(예방) 조치를 마련했다고 운운하는 건 자기 면피로 들린다”고 비판했다.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은행권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 향후 은행에서 고위험 상품을 판매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차라리 은행에서 고위험 상품을 취급하지 못하도록 판매를 금지시켰으면 좋겠다”면서 “오를 땐 가만히 있고, 손실이 나면 은행에 책임지라는 식이면 안 파는 게 낫지 않겠냐”고 설명했다.
은행권은 금융당국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고위험 상품을 판매했다는 주장이다. ELS 판매 과정에서 가입 상품 위험등급, 원금 손실 가능성 등에 대한 이해 여부를 고객으로부터 자필 또는 녹취를 받아 확인을 거쳤다는 것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강화된 금융소비자보호법에 따라 판매 과정에서의 녹취와 필수설명 등을 이행했다”면서 “과거 은행의 비이자 수익을 위해 고위험 상품 판매를 허용했으면서 원금 손실 규모가 커지니 은행 탓으로 돌려 혼란스럽다”고 토로했다.
앞서 금융위원회는 2019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이후 시중은행의 고위험 투자상품 판매를 금지하는 후속대책을 발표했으나, 당시 은행권이 40조 원 이상 규모의 신탁시장을 잃게 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당국이 제한적 주가연계신탁(ELT) 판매를 허용하면서 은행은 H지수 연계 ELS를 판매할 수 있게 됐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DLF 사태 당시 ELS는 은행에서 판매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피해자들이 주장했지만, 금융당국은 상시 점검과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했다”며 “그러나 상시 점검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앞으로 은행의 ELS 판매를 허용할지, 허용한다면 현재의 방식을 유지할 건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면서 “금감원장은 은행이 면피한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당국이 면피용 발언을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금융상품 취급 및 판매에 있어 투자 개념에 초점을 둔 상품을 판매하는 증권사 등과 저축 개념에 따라 원금보전에 초점을 두는 상품을 취급하는 은행 등의 금융기관을 분리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면서 “은행 판매상품을 제한하는 것이 고위험 금융상품의 불완전판매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당국은 관리·감독을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관리감독의 첫 번째는 제도를 셋팅하고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서 “현재 제도적으로는 불완전판매를 할 경우 처벌받는 것으로 셋팅돼 있어 위법이 있으면 위법에 따른 제재를 가하는 프로세스다. 그에 대한 지침을 지키도록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