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기(氣)’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11월 기준, 올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수가 코로나19 유행 이후 4년 만에 처음으로 2000만 명을 넘어섰다. 12월 연말 성수기를 포함하면 2500만 명을 찍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약 9배 증가한 것이고, 코로나19 발생 직전인 2019년 기록한 사상 최대치(3188만 명)의 80% 수준까지 회복했다. 자신감이 붙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030년 외국인 관광객 6000만 명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이 진짜 꿈꾸는 건 관광 명소, 그 너머에 있다. 일본은 지금, 글로벌 유명 기업과 인재를 빨아들여 세계 최고 자리를 꿰차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첨단기술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채 글로벌 이슈를 선도하는 ‘도시’가 있다. 도쿄 상징으로 떠오른 초고층 첨단복합단지 아자부다이힐스는 8만1000㎡ 규모의 전체 부지 중 약 30%가 녹지로 구성됐다. 아자부다이힐스의 랜드마크인 모리JP타워(330m)는 필요 전력의 100%를 신재생에너지로 조달하는 친환경 건물이다. 저성장과 기후위기 시대, 개발과 환경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일본 최고 마천루는 세계 사람들을 홀리고 있다. 아자부다이힐스 개발회사 CEO인 츠지 신고는 “일본은 미국을 못 이겨도, 도쿄는 뉴욕을 누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부활하는 일본의 저력은 사실상 도시인 셈이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까지도 ‘잃어버린 30년’ 꼬리표를 떼지 못한 일본 아니던가. 1990년대까지 급성장을 경험한 일본 경제는 1991년 버블붕괴를 기점으로 장기침체기에 진입했다. 1985년 플라자합의 충격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1997년 아시아발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쇼크를 차례로 겪은 일본은 저성장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경제학자 케인스가 추정한 ‘2% 경제성장률 수렴론’에서 벗어난 단 두 국가 중 하나가 일본이었다. 2% 경제성장률 수렴론은 경제가 성장해 선진국이 되면 경제성장률은 2%로 수렴한다는 가정이다. 일본은 평균 성장률 0.7%로, 이탈리아와 함께 ‘굴욕’을 맛봤다.
그랬던 일본이 반전을 노릴 수 있게 만든 뿌리는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취임한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는 일본 경제 회복의 키는 도쿄가 쥐고 있다며 ‘도쿄구상2000’을 발표했다. 도쿄 집중을 강화하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기능으로 주변 지역을 끌어안는 ‘메갈로폴리스’ 구상이 골자다. 이시하라의 이 같은 도시전략은 당시 일본이 사로잡혀 있던 이데올로기, ‘국토 균형발전’에 맞선 것이었다. 버블 붕괴 후 경제가 추락하는 상황에서 그는 과감한 인식 전환에 앞장섰다.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적극적 도전을 촉구하는 기회의 평등과 그 성과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사회를 구축해 나간다”며 체질 개선을 강조했다. 규제 투성이 도시계획의 재검토를 요청하고, 환경영향평가조례를 개정해 민간 재개발 촉진 환경도 조성했다. 고이즈미 당시 정권은 도시재생특별조치법 제정으로 화답하며 일본의 ‘생존’에 사활을 걸었다. 적극적 규제 완화를 기반으로 한 도쿄구상에 힘입어 인프라 정비와 민간투자의 기초가 만들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20년 후 도쿄 탈바꿈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여기서 멈춘 게 아니다. 대도시 중심으로 살아남는 데 주력한 일본은 2014년엔 ‘국토그랜드디자인 2050’을 수립했다. 인구감소, 출산율 저하, 기후재난 등 시대적 과제에 대비해 또 하나의 ‘미래 구상’에 착수한 것. 일명 ‘Compact+Network’으로, 국토의 부분을 뭉쳐 촘촘한 거점을 만들고, 이들을 연결하겠다는 내용이다.
서울은 어떤가. 1980년대 초 규제를 뼈대로 한 수도권정비계획은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토 균형발전이란 명분 아래 도입된 각종 정책에도 불구하고 지방과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시대가 변한 지 오래고, 기존 제도는 제 기능을 못하는데 논의는 제자리걸음이다. 한국은 저성장 수렁에 빠져들었고, 저출산·고령화·기후재난 등 복합위기의 파고는 빠르게 닥쳐오고 있다. 도시 서울엔 20년 후 한국을 구원할 씨앗이 뿌려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