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지휘자 빠진 오케스트라"
초대형 M&A 3년째 언급에 그쳐
최태원ㆍ구광모도 직간접 소송전
처음 인공지능(AI)이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된 건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바둑 대국에서 승리한 2016년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올해 AI는 대변혁기를 맞았다.
인공지능(AI)이 일상 속의 기술로 침투하면서, 이제 모든 산업은 본격적인 격변기를 거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마치 데이터 통신 기술과 스마트폰이 2000년대 격변을 가져왔던 이상의 충격파를 예상한다.
당시 충격파는 노키아, 모토로라 등의 몰락은 물론 한 국가의 산업 전체를 붕괴시키기도 했다.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등의 기업을 거느리고 전 세계 전자산업을 호령했던 일본이 대표적인 예다.
국내 주요 기업 총수들은 발로 뛰며 AI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이유다.
그러나 지난 8년여의 우리 기업 행보를 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글로벌 경쟁업체들이 AI 기술 개발과 인수합병(M&A)에 올인하는 사이 우리 기업들은 그렇지 못했다.
재계 1위 삼성은 사법리스크가 발목을 잡았다. 삼성전자는 2016년 미국 실리콘밸리의 AI 스타트업 비브랩스와 세계적인 자동차 전장 기업 하만을 잇달아 인수하며 빅테크와 경쟁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국정농단 수사 이후 대형 인수합병(M&A)은 자취를 감췄다. 최종 결정권자인 이재용 당시 부회장과 미래전략실 수뇌부들이 옥고를 치른 여파다.
대신 AI, 핀테크, 디지털 헬스, 로봇, 전장 등에 대한 소규모 투자 정도만 이뤄지고 있다. 조 단위의 초대형 M&A는 사실상 ‘올스톱’ 상태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근 3년 연속으로 CES에서 대형 인수합병 가능성을 거론했으나 실현되지 않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수십조 원 단위의 딜은 "최고경영자(CEO)선에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이 연초에 별도의 메시지를 내지 않고 있는 것도 사법 리스크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에 무게감이 실린다.
삼성이 사법리스크에 시달리는 동안 AI 주도권은 해외 라이벌 기업에 넘어갔다. 구글과 애플, 아마존, MS 등은 주요 AI 스타트업들을 인수하며 시장 주도권을 가져갔다.
사법리스크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재용 회장은 26일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관련 1심 판결’에 참석할 예정이다. 검찰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전후 회계부정 등이 발생했다며 2020년 9월 관련자들을 재판에 넘기고 지난해 11월 이 회장에 대해 징역 5년과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2심과 3심을 거칠 가능성이 높다. 삼성이 2016년 이후 10년 넘게 사법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는 얘기다.
조동근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 삼성은 ‘지휘자 뺀 오케스트라’에 비유할 수 있다"며 "가장 중요한 판단을 내려 줄 총수가 법정 출입에 시간을 뺏기며 경영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LG그룹은 상속 분쟁으로 올해 초 부터 몸살을 앓고 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故(고) 구본무 LG선대 회장의 부인 김영식씨와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구연수씨 등 세 모녀가 '경영 참여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정황이 나오면서 경영권 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이혼 소송 항소심을 벌이고 있다.
재계는 오너들의 사법 리스크가 기업 경영 활동에 직·간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소송을 준비하고, 재판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경영 활동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과 같은 주요 경영 의사 결정도 미뤄질 수 있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재계 총수들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법원에서 다투는 것이 아니다"라며 "세계적인 CEO들과 경쟁해서 기업을 키우는 일을 해야 한다. 한시가 급하다. 정확한 때에 정확한 지시를 하는 것이 총수의 역할이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