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관 정조준한 식약처 마약 정책…중증 통증 환자들 “약 못 받아 죽고 싶어”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꺼내 든 정책이 엉뚱하게 환자들을 잡고 있다. 의사의 처방에 대한 관리가 강화되면서 마약성 진통제가 필요한 환자들이 적정량의 약을 처방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마약류 오남용 근절이 시급하지만, 이를 위한 정책이 되레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어낸다는 지적이다.
19일 의료계에 따르면 통증관리가 필요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들 사이에는 최근 ‘소명하기’가 고정적인 일과로 자리 잡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날아오는 사유서 요청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식약처는 의료용 마약류를 보험급여 기준용량보다 많이 처방해 '과다처방'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포착되면, 해당 처방을 낸 의사에게 공문을 보내 처방 사유서를 요청하고 있다.
사유서는 의사의 처방을 제한하는 강제력이나, 징벌적 효력은 없다. 다만, 의사는 환자마다 의무기록을 재검토하고, 초과량 처방 이유를 해명해 사유서를 회신해야 한다.
서울의 모 대학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병원에서는 매달 식약처로부터 사유서 요청을 받은 교수들의 진료과와 이름을 공지한다”라며 “우리 과가 항상 1위로 지적을 받고, 내 이름이 빠지는 때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의사들은 교과서적 지식과 임상 경험에 기반해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데, 행정적 감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알게 모르게 소신진료가 위축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정부가 마약류 오남용 근절에 나서면서 의료기관이 집중 점검 대상이 됐다. 식약처는 지난해 4월부터 '마약류오남용감시단TF'를 구성했다. TF는 의료용 마약류 과다처방‧오남용‧불법취급 의심 사례에 지자체·경찰청과 함께 월 1회 기획 감시를 실시하고 있다. 식욕억제제‧졸피뎀‧프로포폴 등을 오남용 조치기준을 벗어나 처방한 의사를 대상으로 해당 내용을 서면 통지하고 개선 여부를 추적‧관리하는 ‘사전알리미’도 실시했다.
의사들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진료와 처방이 사사건건 감시의 대상이 되면서다.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충분한 용량의 약을 처방하면, 식약처의 사유서 요청이 병원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다. 사유서 작성으로 인한 행정 업무 부담은 물론, 피고용자의 처지에서 병원 측의 눈치까지 보게 된다. 진료실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법대로 할 테니, 참아라’라는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환자들도 속이 타들어 가기는 마찬가지다. 필요한 만큼의 약을 받지 못해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크다. 암 환자와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CRPS)' 환자들은 마약성 진통제를 투약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 통증의 강도는 0부터 10까지 점수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7점 이상의 중증 통증을 경험한다. CRPS 환자는 특별한 원인 없이 9~10점 단계의 고통을 주기적으로 경험하기도 한다. 이는 출산 시 산모가 느끼는 고통과 같은 수준이다.
마약성 진통제를 주기적으로 투약하는 환자 이 모(55·남) 씨는 “발작성 통증은 알약보다 주사제가 진통에 효과적인데, 집 주변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마약성 진통제 이야기를 꺼내면 '약쟁이' 취급을 당한다”라며 “주사제를 처방받으려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병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통증이 찾아오면 속수무책”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너무 고통이 심한 날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한다”라며 “투약을 못 하면 기절하거나, 응급실에 실려 간다”라고 말했다.
통증을 피할 방법이 줄어들었다는 불안감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되는 실정이다. 또 다른 환자 조 모(31·남) 씨는 “기존에는 1~2일 치 용량의 비상용 진통제를 함께 처방받았는데, 지금은 담당 의사가 ‘마약 오남용으로 의심을 받을 수 있다’라면서 비상용 약을 주지 않는다”라며 “펜타닐 패치는 기존보다 3분의 1로 처방량이 줄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약을 분실하거나, 갑자기 통증이 심해지면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하고, 우울증이 심해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라고 호소했다.
문제의 온상인 불법 마약류 문제는 방치하고, 의료용 마약류에 대한 규제만 불필요하게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흥가에 돌아다니는 불법 마약류와, 의료기관에서 사용하는 의약품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의 분석이다.
최종범 아주대병원 교수는 “제대로 된 규제 시스템 없이 무작정 의사들에게 엄포를 놓는다고 마약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라며 “강력한 조사와 통제가 시급한 곳은 클럽과 유흥주점이지, 병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약류 의약품을 무분별하게 처방하는 소수의 동네 의원을 잡기 위해 대학병원에 다니는 중증 환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마약이 필요한 건강 취약계층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는 비판이다. 박휴정 서울성모병원 교수는 “의료용 마약류 사용이 증가하는 이유는 고령화로 암을 비롯한 중증질환자가 증가하고, 통증 자체를 정식 질환으로 인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며 “사용량 증가를 오남용 증가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만연했다”라고 우려했다. 그는 “현재 필요한 것은 마약 ‘퇴치’가 아니라, 마약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시스템’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식약처는 2018년부터 마약류통합관리시스템(NIMS)을 도입해 각 의료기관의 마약류 입고, 처방, 재고 내역 등을 보고받고 있다. 올해 6월부터는 ‘의료용 마약류 투약 이력 확인 의무화 제도’가 시행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의사는 환자 진료·처방 시 환자의 최근 1년간 마약류 투약 이력을 의무적으로 조회해야 한다. 제도 적용 품목은 펜타닐 성분 의약품부터 시작해 점차 확대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