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 주주가치 제고 요구
현대차·기아 등 배당금 올리고
메리츠금융·셀트리온은 주식 소각
경영 개입으로 오너와 마찰 잦아
충당금 적립 바쁜 금융지주 곤혹
# P&G는 2010년 이후 경쟁사 유니레버에 밀리며 실적이 부진해졌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P&G가 보유한 200여 개의 브랜드 중 수익성이 높은 브랜드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국 2014년 P&G는 투자자들의 요구에 따라 비핵심 브랜드 매각을 발표했다. 2015년 듀라셀을 버크셔 해서웨이에, 웰라를 COTY에 매각했다.
국내에서도 3월 벚꽃 주총시즌을 앞두고 행동주의 펀드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행동주의 펀드들이 기업들을 대상으로 배당확대와 자사주매입 및 소각확대를 포함한 주주친화정책의 강화, 기업경영 효율화,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 기업지배구조의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해당 기업의 대주주 또는 경영진과 대립하는 상황이 늘고 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지난해 12월 주주가치 확대로 주가 상승이 기대되는 종목을 선별해 담은 상장지수펀드(ETF)를 설정했다. 저평가 기업 중 주주가치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에 투자하는 ETF다. 구체적으로 향후 경영진의 행동 변화, 행동주의의 타깃 등을 계기로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가치 확대가 예상되는 기업이 대상이다. 고려아연, KCC, 한국알콜, 현대글로비스, 동화약품, CJ, 메가스터디교육, 태광산업, LS, 키움증권 등이 주요 구성종목에 포함됐다. 이들 기업이 행동주의 펀드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강대석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행동주의 캠페인은 주주가치 제고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기업들을 중심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며 “지난해 12월 중순경에 상장된 트러스톤 자산운용의 주주가치액티브 ETF 및 구성종목도 참고할 만하다”고 말했다.
SK증권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소수주주의 주주권 행사 가능성 있는 기업으로 110여 개를 꼽았다. 이들 기업은 지난해 5월 기준 주가 수익률이 코스피를 밑돌고, 2년 연속 영업이익이 감소했으며, 3년간 모두 배당을 지급하지 않은 곳들이다. 듀산퓨어셀, 펄어비스, HLB생명과학 등 덩치 큰 기업들도 다수 포함됐다.
최관순 SK증권 연구원은 “이들 기업은 부진한 경영성과와 주가 하락, 무배당 등 소수주주의 경영진에 대한 불만이 높을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될 수도 있으며, 주주제안을 통해 기존 경영진이 책임을 추궁받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 들어 저PBR 테마 열풍이 부는 가운데 주총을 앞두고 행동주의 펀드들의 사냥감 고르기가 시작되자 기업들은 긴장하고 있다. 국내 한 상장사 임원은 “달라진 행동주의 펀드의 위상 탓에 그들의 요구를 마냥 무시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리한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요즘은 시장에서 저평가 종목이라며 주목받는 것 조차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의 공격을 받고 있는 금융지주사들은 더 곤혹스럽다. 금융당국이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등 손실에 대비해 충당금 적립을 강조하고 있는데,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소각 등 주주환원을 마냥 확대할 수만도 없어서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양립하기 어려운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2인분 같은 1인분’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비유했다.
행동주의 펀드들의 요구사항은 배당확대, 자사주매입 및 소각 등 주로 주주친화정책의 강화다. 그러나 지나친 주주환원정책이 오히려 기업의 펀더멘탈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18년 6월 무디스는 스타벅스의 장기 신용등급을 A3에서 Baa1으로 하향하고,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변경했다. 신용도 하향의 주요 사유로는 스타벅스의 주주환원정책 강화를 꼽았다. 당시 스타벅스는 주주들에게 150억 달러를 지급하려던 계획을 바꿔 3년간 약 250억 달러를 주주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때 배당 및 자사주 매입 재원의 일부는 차입을 통해 조달하기로 했다. 무디스는 증액된 주주환원 규모로 차입 수준이 유의미하게 증가하고 신용지표가 악화될 것이라고 봤다.
보잉은 2019년 이전까지 5개년 주주환원 규모가 약 527억 달러로 같은 기간 잉여현금흐름 466억 달러를 웃돌았다. 그러나 2018~2019년 보잉737맥스의 연이은 추락과 펜데믹에 따른 여행수요 감소로 영업실적이 크게 떨어지며 2020년 초 유동성 위기가 발생했다. 결국 보잉은 2026년까지 주주환원 중단을 발표했다.
한국신용평가는 “주주환원의 확대는 주주이익 극대화 관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으나, 그 규모가 지나치면 원리금상환능력의 저하로 이어져 신용도 하향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적시에 미래사업에 대한 투자가 진행되지 못하면 장기 경쟁력에 훼손돼 결국 주주의 손해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주환원 양극화도 부담이다. 총알이 충분한 덩치 큰 기업들은 매를 덜 맞기 위해 주주환원을 늘려도 경영에 크게 무리가 안 갈 수 있지만, 한 해 벌어 한 해 투자하기도 바쁜 중·소기업들은 여기저기서 매가 날아와도 내놓을 곳간이 없다. 이는 다시 투자자들의 엇갈린 반응으로 이어지며 주가 상승과 하락이라는 양극화로 연결된다.
자사주 소각도 규모가 큰 기업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국내 유가증권시장의 주주환원 규모는 2013년 13조6000억 원에서 2022년 41조5600억 원으로 10년새 206% 증가했다. 국내 상장사들은 지난해에만 6조 원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했다. 전년 대비 76% 늘어난 규모다.
메리츠금융지주는 합병 전 메리츠증권과 메리츠화재를 포함해 지난해 총 5889억 원 어치의 주식을 소각했고. 셀트리온은 셀트리온헬스케어와의 합병을 앞두고 주가 부양을 위해 3600억 원어치의 주식을 소각했다.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주주서한을 받은 삼성물산도 최근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1조 원 이상의 자사주를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KT&G는 향후 3년간 매년 5% 규모의 주식소각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