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총선을 앞두고 서로 다른 정당의 대표였던 이낙연·이준석 공동대표가 신(新)개혁신당으로 모이면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 재차 소환됐다. 이념이 다른 정당에 있었기에 ‘반윤·반명 연합정당’, ‘연합군’, ‘잡탕정당’ 등 다양한 말로 불린다.
하지만 개혁신당 측은 대한민국 정치권 연대 성공 사례인 ‘DJP연합’에 가깝다고 한다. 김용남 정책위의장은 12일 SBS 김태현의 정치쇼에서 “통합된 개혁신당에서 보여주는 차이는 과거에 있었던 DJ와 JP의 연합보다 훨씬 작은 차이”라고 말했다. 이낙연 공동대표도 합당하기 전 이준석 공동대표와의 관계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그 두 분의 거리보다는 저와 이준석 전 대표의 거리가 훨씬 가까울 것”라고 했다.(1월 11일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이들의 연대는 1997년 성사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와의 연합과 맞닿아 있을까.
메시지가 민심을 관통하느냐에서 차이점이 있다는 평가가 있다. 여의도 사정에 정통한 정치권 관계자는 “제3지대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같이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서 “양당이 어떻다는 얘기가 아닌 대한민국 상황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혁신당은 ‘거대양당 심판론’을 전면에 내걸어 ‘정치개혁’을 주장했지만, 윤석열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 부정평가 1위는 줄곧 ‘경제ㆍ민생ㆍ물가’였다.
27년전은 달랐다. 연합을 완수한 뒤 대선에 나선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는 ‘정권교체’를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대선 일주일 전에는 ‘IMF재협상론’을 꺼내 들었다. 김영삼 정부 말기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등 잇따른 대형 사고와 한보철강 비리, IMF사태 등 경제난이 이어졌다. 김영삼 정부가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지지율이 6%로 추락했던 때였다.
합의 과정이 DJP연합만큼 충분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DJP연합은 1997년 12월 18일에 시행된 15대 대선 약 두 달 전인 10월 26일 전격 성사됐다.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공조는 1996년 15대 총선 직후부터 수면 위로 떠올랐었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원내 과반 의석 확보를 위해 무소속과 통합민주당 당선인들을 영입하자 두 야당은 원 구성 협상에 불참, 함께 규탄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양당은 1996년 재보궐선거에서 연합공천도 시행했다.
1997년 대선 당시 DJP연합을 주도했던 한광옥 전 비서실장은 2012년 11월 BBS라디오 인터뷰에서 “(정치연합을 할 때 물밑작업을) 저는 6개월 이상 했는데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제3지대 정당들은 올 초 창당 작업을 마친 뒤부터 지도체제와 당명 등으로 설 직전까지 진통을 겪었다. 정강 정책 논의는 없었다. 양향자 원내대표는 14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통합을 안 하고 설을 보내게 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며 “설 연휴 자체가 계기가 됐고, 설 연휴 전에 통합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