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정신적 고통 병원이 돕지만…사회적 차별 해소 까마득 [아픔 나누기, 그리고 희망]
뇌전증 환자들은 사회생활 과정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다. 질환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입학과 취업 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물론, 질환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부족해 제대로 된 응급조치를 받지 못하는 등 사회적 소외가 심각한 실정이다.
뇌전증은 뇌의 신경세포에 일시적인 이상이 발생해 과흥분 상태가 나타나 의식장애와 발작이 일어나는 질환이다. 과거 ‘간질’로 불렸으나, 질환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공식 질환 이름이 2009년 뇌전증으로 변경됐다.
29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민관심질병통계에 따르면 국내 뇌전증 진료인원(입원·외래)은 2022년 기준 15만747명이다.
뇌전증은 환자마다 경련의 정도와 주기가 다르다. 증상은 신체 일부가 떨리는 부분발작부터, 전신이 심하게 경련하고 몸이 굳는 근간대발작까지 다양하다. 환자들은 갑작스럽게 경련이 발생하면 응급조치를 받기 어려워 대중교통이나 공공장소를 기피하기도 한다.
신체적 고통만큼 ‘사회적 기능장애’가 주는 고통도 만만치 않다. 직장에서 경련이 발생하면 의도치 않게 동료들에게 자신의 병력이 공개되고, 간접적인 사직 압박을 당하는 경우도 흔하다.
대한뇌전증학회가 뇌전증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 1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과거에 비해 환자와 보호자들의 뇌전증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개선됐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69.6%가 “분명 긍정적 변화가 있지만 아직은 미흡하다”라고 답했다. 뇌전증으로 인해 환자들이 겪는 차별로는 ‘직업 선택의 어려움’(79.5%)과 ‘직장생활에서의 차별’(67.0%)이란 응답이 가장 많았다.
허경 대한뇌전증협회 이사장(세브란스병원 신경과 교수)은 “뇌전증 환자들은 직장에서 발작이 일어나 해고되거나, 근무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소견서를 받아오라는 요청을 받는다”라며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봐 두려워 복용 중인 뇌전증 치료제를 무리하게 끊고자 했던 환자도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사회적 낙인 때문에 우울증이나 불안 등 정신적인 고통을 함께 겪는 환자들이 상당수”라고 안타까워 했다.
환자들이 교육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도 크다. 뇌전증 환자에 대한 응급조치 역량이 없다는 이유로 보육기관이나 학교가 환자의 입학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뇌전증 환아 보호자 모임 ‘빵아빵아’를 운영하는 허도경 씨는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경련이 발생하면, 도와줄 수 없다면서 아이의 입학을 거부하는 곳이 많았다”라며 “뇌전증 환자들이 사회에 진출해 일을 하고 싶어도, 이들을 받아주는 직장을 찾기 어렵다”라고 토로했다.
따라서 환아 보호자는 아이를 받아주는 기관을 찾아 거주지 멀리 이동하거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종일 함께 다니며 일상을 포기하고 있다. 뇌전증을 앓던 자녀를 떠나보낸 조다솜 씨는 “아이가 여러 가지 의료기기를 달고 있어 외부 이동 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었다”라며 “발작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집에서만 아이를 키운 것이 항상 안타까웠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뇌전증 환자와 보호자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국회에서 2020년 발의된 ‘뇌전증 관리 및 뇌전증 환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뇌전증 관리·지원법)’은 보건복지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류된 상태다. 21대 국회가 끝나는 5월 29일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된다.
뇌전증 환자 당사자인 이준아 부산가톨릭대 간호학과 교수는 “뇌전증 환자들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병원에서 도와줄 수 있지만, 사회적 기능 장애는 도움을 청할 곳이 전혀 없어 환자와 그 가족들이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라며 “환자에 대한 차별과 소외를 해소하고, 경제·사회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