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뛰어나고 방대한 데이터가 있어도 이를 ‘화룡점정’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인간의 사색과 해석력입니다. 인공지능(AI), 디지털, 혁신기술을 구호에만 그치지 말고, 이를 활용해 보험산업 발전에 적용할 줄 아는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해 보험개발원이 4차 산업혁명의 전초기지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허창언 보험개발원장은 위기로 불리는 보험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보험 패러다임의 전환과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따른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허 원장이 강조한 것은 4차 산업혁명에 직면한 보험산업의 생존에 대한 고민과 대안, 혁신에 대한 의지였다.
보험 시장은 그 어떤 산업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시장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만한 굵직굵직한 이슈들이 한꺼번에 터졌다. 보험사들의 순위를 바꿀 새 회계제도(IFRS17)와 신지급여력제도(K-ICS)가 시행됐으며 14년간 문턱을 넘지 못했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도 국회를 통과했다.
그는 취임 초부터 한 해 약 90억여 건이 집적되는 개발원의 데이터와 타 금융·비금융권의 데이터를 연계·융합, 보험산업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함을 강조했다. 금융보안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해외 주요 현장에서 직접 체감한 4차산업 혁명 기술의 발달도 보험산업 디지털 혁신을 앞장서는데 큰 도움이 됐다.
5일 본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허 원장은 데이터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이를 위해 개발원은 데이터를 활용한 종합컨설팅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개발원의 고유 업무는 보험요율 산출이지만 이 일의 상당 부분은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 원장은 “4차 산업혁명의 ‘금은보화’라고 불리는 데이터가 개발원 창고에 쌓여있다”며 “매년 90억 건 이상의 데이터가 개발원에 들어오는 만큼 이를 활용한 데이터 결합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발원이 살아남으려면 컨설팅을 해야 한다”며 “언더라이팅부터 마케팅, 회계까지 종합적으로 컨설팅할 수 있는 기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허 원장 취임 이후 1년 사이에 보험개발원은 데이터 컨설팅 관련 인원을 확충됐다. 취임 초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기술혁신을 보험에 접목하기 위한 전담부서인 인슈어테크팀을 신설했다.
지난해 말에는 AI 기반 ‘데이터 기획·결합·상품화’ 기능을 통합 추진하는 ‘데이터 신성장실’을 신설해 관련 전문인력을 배치하며 보험개발원이 ‘보험산업 데이터 혁신 플랫폼’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향후 신용평가회사, 카드회사 및 통신사 등과 데이터 결합도 추진한다. 카드사의 데이터를 활용해 고객의 소비성향을 분석하고 이를 활용한 언더라이팅 자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사업은 올해 상반기 데이터 결합을 완료하고 하반기 국제포럼 등에서 대대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허 원장은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을 ‘승자독식’이라고 표현한다. 뒤처지는 순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결국, 혁신기술을 구호에만 그치지 말고 데이터를 해석해 보험산업 발전에 적용할 줄 아는 인재 발굴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허 원장은 지난달 20일부터 23일까지 동남아 3개국(필리핀, 말레이시아, 태국)을 다녀왔다. 4박6일간 총 3개국 방문에 4번의 비행 중 3번이 밤비행일 정도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체력이 곧 국력’이라는 말을 실감했다는 그는 각 국가의 보험정책당국 등 유관기관을 방문해 보험산업 발전을 위한 업무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그는 “단순히 사진촬영을 위한 MOU를 맺고 오지 않았다. 인적교류, 인프라 구축 등 실제 업무 협력을 위한 착수에 바로 들어갔다”며 “지난해 12월 인도네시아와 처음으로 교류를 시작한 이후 양국 직원들이 서로 연수를 오고가는 등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허 원장은 동남아 보험시장을 태동기라고 표현했다. 이곳에 K-보험인프라를 전파하는 것이 국내 보험사가 쉽게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은 한국의 통계집적시스템과 정보시스템 뿐만 아니라 직원 역량 강화 등 인재 육성에도 큰 관심을 보이는 상황이다. 이에 맞춰 개발원은 중장기적으로 동남아 미개척 시장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노하우를 전수하며 점진적으로 협력국가를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이달 말에도 베트남을 방문할 예정이다. 벌써 5번째 동남아 국가와의 업무협약이다. 몽골 금융당국에서도 개발원에 컨설팅을 요청한 상태다. 자동차 의무보험 DB시스템 개선을 위해 개발원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대만이나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일본·대만 3개국은 법제도, 경제발전, 보험시장 성숙도가 비슷한 수준으로 고령화나 인슈어테크, 시장포화 등 보험산업이 안고 있는 과제도 유사한 측면이 많다. 향후 보험개발원은 이들 국가와 세미나, 정보교류회 등을 수시로 진행할 예정이다.
지난달 보험개발원은 실손의료보험 청구 전산화 전송대행기관(중계기관)으로 지정됐다. 오는 10월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가 시행되면 병원이 환자의 진료내역을 전자문서 형태로 보험사에 보내게 되는데 개발원이 이 과정을 맡는다.
개발원은 이미 모든 보험사와 연계돼 있으므로 향후 모든 병원, 약국과 연계된다면 소비자는 개발원을 통해 쉽게 보험금 청구를 할 수 있다. 병원 이용내용과 보험가입 이력을 자동으로 확인하고 보다 편리하게 보험금 청구를 할 수 있도록 서비스할 예정이다.
허 원장은 전 직원을 하나의 실손보험 청구 중계기관 태스크포스(TF)화할 정도로 미리 준비했다. 선정에 대비해 TF를 구성해 기민하게 대응하고 움직일 것을 지시했다. 관련 업무를 최우선 순위로 이행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청구 전산화 업무의 정확한 현황분석과 방향성 수립을 위해 지난해 12월부터 시스템 설계를 발주했다”면서 “10월까지 차질 없이 완료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중계기관으로서 운영에 대한 자신감도 내비쳤다. 개발원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 원장은 “개발원은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 전송대행기관을 위한 요건인 공공성, 보안성, 전문성을 모두 갖췄다”며 “민감한 데이터를 다루는 만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