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암행어사가 마패(馬牌)만큼 소중히 다룬 물건이 있다. 바로 유척(鍮尺)이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로 곡식, 옷감 등 세금의 무게, 길이를 재는 기구가 얼마나 정확한지 판별하는 기준이었다.
암행어사는 유척을 활용해 지방 수령의 세금 수탈을 방지하고 올바른 양의 세금이 징수될 수 있도록 관리·감독했다. 이러한 유척은 조선시대 도량형 제도의 표준으로서 사회 안정에 이바지하는 바가 컸다.
시간이 흐른 지금, 표준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날로 커지면서 세계 각국은 현대판 유척을 만들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 (AI) 등 첨단기술 분야의 국제표준 선점은 제품의 세계시장 진출과 경쟁력 확보 기능을 넘어 미래 산업을 선도하고 경쟁국과 혁신 역량 격차를 높이는 수단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다.
이에 주요 선진국들은 표준 선점이 곧 국가 산업 주도라는 패러다임 아래 국제표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전략을 수립하는 등 총성 없는 글로벌 표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러한 국제표준 흐름과 첨단산업 기술 패러다임 속에서, 우리나라도 표준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제표준화기구(ISO)·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의 대표 정부 기관으로 활동하는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을 필두로 민·관·연이 굳건한 '원팀 코리아(One team Korea)'로 다양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첫째, 대한민국이 세계시장에서 룰(Rule) 메이커로 도약하기 위한 길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표준화 전략 수립, 표준외교, 지속적인 전문가 육성 정책 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국가표준역량 결집을 위한 표준 리더십 포럼과 인공지능, 양자기술, 반도체 등 12개 산업별로 표준포럼 운영을 통해 '첨단산업 국가표준화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미국, 독일 등 주요 표준강국, 국제기구 회원국과 실질적인 협력 확대 등 표준외교를 강화해 첨단산업 분야 국제표준 공동개발 속도를 높인다. 이와 함께 연 3.2만 명을 대상으로 한 생애 단계별 표준교육을 통해 첨단기술 분야 표준을 이끌어갈 차세대 전문가를 육성에 힘쓸 계획이다.
둘째, 국제표준화기구 내 대한민국 위상을 강화한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정부와 관련기관의 원팀 협업 등을 통해 ISO·IEC 정책의 최고 의결기구인 이사국 진출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한국인이 이끄는 국제표준 시대에 발맞춰 ISO 이사로 활동하는 필자를 비롯한 ISO 조성환 회장, IEC 이정준 이사와 기술 분야별 표준전문가들은 우리 정부와 함께 대한민국 위상을 제고하고 표준강국 도약을 한 발짝 더 앞당길 것이다.
최근 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정책 최고 의결기구인 123차 ISO 이사회 회의가 개최됐다. 특히 표준의 디지털화, AI 기반 표준 활용방안 제시, 기후변화에 따른 ISO 대응 및 저개발국가 표준 접근성 개선 방안 등이 논의됐다. 원팀 코리아는 전 세계 국가와 함께 국제표준화 정책 수립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대한민국 표준 리더십을 드높였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몸담은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도 첨단기술분야 국제표준화 정책을 적극 뒷받침하고자 한다. 지난 58년간 축적한 시험인증 기술과 표준 노하우를 바탕으로 산업·의료 AI, 미래모빌리티, 우주항공, 친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국제표준 수립 과정에 참여해 우리 산업계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울러, 국내 최대 규모인 55개국 160여 개의 글로벌 시험인증 네트워크와 아시아인증기관협의회(ANF)를 적극 활용해 AI 신뢰성 등 첨단제품 시험인증 상호인정 논의, 글로벌 기술규제(TBT) 대응 교류 등 수출 활성화를 위해 전(全)방위적인 지원을 약속드린다.
이처럼 국제표준을 이끌 '원팀 코리아'는 국가 위상 제고와 동시에 우리 기업이 세계무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든든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과거 부족한 천연자원의 한계를 극복하고 수출입국을 표방하며 수출 6대 강국으로 감동의 드라마를 쓴 것처럼, 국제표준화 주도를 통해 머지않은 미래에 첨단기술 표준강국의 주인공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