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장이 전반적인 은행 경영을 총괄한다고 하면 부행장은 실질적인 사업을 담당하는 집행임원이라고 할 수 있다. 뱅커 중엔 최고 자리까지 올라간 부행장을 우리는 ‘은행의 별’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부행장이 되기까지가 어렵고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본지는 부행장의 현황과 역할을 짚어보고 인터뷰를 통해 부행장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업무에 대한 이야기, 후배 은행원에 대한 당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호진 하나은행 부행장은 기업금융(IB) 1세대로 꼽힌다. 국내 은행권에서는 외환위기 사태 이후인 1999년 말부터 2000년대 초반 IB 업무가 시작됐다. 하나은행과 합병 이전인 1992년 외환은행에 입행한 그는 투자금융부에 발령받은 이후 23년간 IB에서 근무한 ‘투자금융 전문가’로 꼽힌다. 주로 글로벌 사모펀드(PE·Private Equity)나 국내 대기업들의 기업 인수 시 소요되는 자금을 지원하는 인수금융과 지분투자 등의 업무를 해왔다.
현재 우리나라의 자본이 튼튼하다보니 국내 금융사들이 경쟁하는 환경이 조성됐지만, 처음 IB 업무가 만들어질 때만 해도 외국계로부터 배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표준약관에 쓰는 생소한 용어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전 부행장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영문 계약서의 내용이 국내에서 사용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이를 이해한 후 크래딧 구조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소요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은 국내 로펌들도 한글로 계약서를 만들면서 많이 정제되고 좋아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2007년 당시 외환은행의 홍콩 투자은행 현지법인인 K.A.F를 설립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전 부행장은 “홍콩 금융당국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내부적으로는 법인을 만들 때 당위성 등 여러 가지 설득이 있어야 한다”면서 “별도 팀이 도와줬지만 중간에 커뮤케이션도 하고, 홍콩 당국과의 작업 등을 거쳤다. 엄격한 룰에 따라 자본 비율, 인·물적 환경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딜은 2007년에 있었던 휠라코리아의 FILA 글로벌 인수금융이다. 당시 상당히 큰 금액이었던 약 3억 달러 정도의 부채조달(DEBTFINANCING)과 경영자 매수(MBO) 방식의 인수금융을 주선했다. 당시 자금이 워낙 적은 데다 내부적으로 반대도 심해 어려움이 많았던 만큼 큰 보람이 있었다고 답했다.
수많은 딜을 성공시킨 전문가에게는 투자 철학이 있을 터. 그는 은행 IB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롱텀릴레이션십(Long-term Relationship)’을 꼽았다. 전 부행장은 “우리가 만나는 시장 플레이어들은 한 번 만나고 끝나는 사람들이 아니다”라면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지금 대부분 대표가 돼 있다”고 했다.
특히, 인수금융에서 롱텀-릴레이션십이 빛을 발휘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 회사들은 인수금융 대출을 받을 때 기관투자자(LP)에 출자한 기관들을 상대로 협상을 통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하나은행이 타행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이유는 외국계와 딜을 많이 하면서 글로벌 사모펀드(PEF·Private Equity fund)와 오랜 관계를 쌓아왔기 때문”이라고 피력했다.
금리나 조건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일정 부분 양보해주면 신뢰 관계가 쌓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비밀 유지 또한 중요하게 꼽는 원칙이다. 전 부행장은 “상대방에게서 비밀 유지를 지켜줘야 한다. 신뢰가 없으면 딜을 하기가 정말 어렵다”면서 “직원에게도 ‘관계 자산’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설명했다.
관계 자산은 성과로 나타났다. 2020년 기준 3200억 원이었던 IB그룹의 일반영업이익은 그가 그룹장으로 있었던 지난해 6200억 원으로 3000억 원 늘었다. 같은 기간 보유자산 규모는 3년 간 연평균 20%씩 증가했다.
전 부행장의 목표는 IB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분 투자 등을 통한 업의 경쟁력을 확장하고, 해당 기업들과 협업을 통해 상생 금융 모델을 구축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예컨대, 플랫폼 기업을 통해 플랫폼 유저에게 은행의 다양한 금융상품을 제공하고, 인수 금융 대상인 제조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협업 마케팅을 추진하는 등 IB그룹의 은행 내 기여를 확장하는 식이다.
그는 “은행 IB의 역할은 우량자산을 가져오는 것이고, 여기에 덧붙여 기업손님을 모셔오는 것”이라면서 “수수료도 중요하지만 인수하는 회사의 기업금융을 우리 영업점과 연계시키는데 많은 고민을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조금 더 나아가 ‘손님의 손님’에 집중하고 있다. 전 부행장은 “기업금융을 연결해준 타깃컴퍼니 회사가 있으면 이 회사에 거래하는 손님들이 있다. B2C(기업과 소비자간 거래) 기업의 경우 손님들을 하나은행으로 모셔올 수 있도록 한다”면서 “구독경제같이 매월 지불해야 하는 경우 은행에서 혜택을 줄 수 있도록 관련 부서들과 얘기를 나눈다. IB의 역할은 단순하게 수수료를 버는 것보다 기업 손님을 연결해주고, 이에 파생되는 손님을 연결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부행장은 후배들에게 ‘인프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현재 기관,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20년 후의 본인의 성과가 결정된다는 것. 그는 “근무 초창기에 만나는 사람들이 10년, 20년 후에는 의사결정권자가 된다”면서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본인이 팀장이나 부장, 임원이 됐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