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첫 영수회담으로 커졌던 소통과 협치의 기대감이 '채 상병 특검법'의 국회 통과로 무색해지고 있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만남이 합의 없이 종료됐음에도 소통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지만, 야당이 지난 2일 채 상병 특검법을 단독으로 처리한 뒤 양측이 대립각을 세우면서 정국은 다시 얼어붙는 분위기다. 정치권 안팎에선 추가 영수회담이 사실상 물 건너간 게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민주당은 지난 2일 이른바 채 상병 특검법으로 불리는 ‘순직 해병 진상규명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안’을 여야 합의 없이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재석 의원 168명 중 168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됐다.
채 상병 특검법은 민주당 주도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에 지정돼 지난달 3일 본회의에 자동 부의됐고, 이날 오후 본회의에서 '이태원참사특별법'을 합의 처리한 뒤 의사일정 변경 동의안을 제출해 채 상병 특검법 상정을 요구했다. 국민의힘은 본회의 안건이 아니었던 특검법이 야당의 의사일정 변경으로 상정·표결되는 데에 항의하며 표결에 불참했다.
대통령실은 곧바로 "협치 첫 장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입법폭주 하는 것은 여야 힘을 합쳐 민생을 챙기라는 총선 민의와 국민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라며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같은 날 오후 현안 브리핑을 통해 "민주당이 오늘 국회 본회의에서 채 상병 특검법을 의사일정까지 바꿔가며 일방 강행 처리한 것에 대단히 유감"이라며 "공수처와 경찰이 본격 수사를 하는 사건임에도 야당 일방 주도로 특검을 강행하는 것은 진상규명보다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영수회담에 이은 이태원특별법 합의 처리로 협치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은 시점이란 점에서 대통령실은 민주당의 일방 입법 폭주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특히 "채 상병을 정치적 목적에 악용하는 나쁜 정치"라며 "엄중히 대응하겠다"고 사실상 재의요구권(거부권) 가능성도 시사했다.
양 측의 대치는 다음 날인 3일에도 이어졌다. 이 대표는 "특검을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다. 범인이 아닐 테니까 거부하지 않을 걸로 믿는다"며 공세를 이어갔고,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MBC 라디오 방송을 통해 "사법 절차에 지금 상당히 어긋나는 입법 폭거다. 이걸 받아들이면 나쁜 선례를 남기는 거고 더 나아가 직무유기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21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열리는 본회의에서 재의결할 방침이다.
여기다 22대 국회 거대 야당의 원내를 이끌게 된 박찬대 신임 원내대표가 22대 국회 시작과 동시에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재발의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여서 특검법을 중심으로 한 대치 정국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멀어지는 추가 영수회담
결국, 지난달 29일 영수회담 이후 높아졌던 협치 정국은 단 사흘 만에 대치 정국으로 돌변하게 됐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회담 정례화 가능성은 더 낮아지는 분위기다. 앞서 대통령실은 영수회담이 끝난 직후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앞으로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회담 정례화 가능성 등을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지난 1일 SBS라디오에서 영수회담과 관련해 "시급한 현안은 많은데 성과가 없었다"며 "물밑 협상은 있겠지만 만나봐야 둘이 뭐 하는지 뻔히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대표도 CBS 라디오에서 양 측이 다시 만나겠냐는 질문에 대해 "대통령은 안 만나고 싶어 할 것 같다"며 "야당 대표는 대통령에게 뭘 요구하고 계속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는데, 다음에 또 만나려고 했으면 그럴 수 있게끔 (영수회담)을 끝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전날 신율 명지대 교수 역시 MBC라디오에서 "대통령실은 민주당이 단독으로 의사일정을 변경하고 (채 상병 특검법을) 처리한 것을 거부권의 명분으로 생각하고, 민주당은 (대통령실이) 민심에 역행한다는 이유를 들 것"이라며 "추가 영수회담은 물 건너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