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로 책임준공 리스크를 떠안은 신탁사가 수백억 원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14개 신탁사가 손해배상을 할 위험에 놓인 비용이 2조 원에 육박하면서 몇몇 신탁사들은 책임준공형 관리형토지신탁 수주를 중단하고 있다. 이에 건설공제조합이 책임준공 보증상품을 내놨지만 혜택을 볼 수 있는 건설사가 제한적이어서 중소건설사의 어려움을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12일 신탁 업계에 따르면 신탁사들이 책임준공형(책준형) 관리형토지신탁 판매를 중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부동산신탁사 관계자는 "올해 들어 책준형 신탁 수주를 중단했고 앞으로도 재개할 계획이 없다"며 "신탁업계에서 책준형 신탁이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권신애 나이스신용평가 책임연구위원 역시 "신탁사 대부분이 올해 신규 수주를 안 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책준형 신탁상품이 팔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탁사의 책준형 관리형토지신탁은 시공사가 파산하거나 공사를 포기하더라도 신탁사가 대신 정해진 공사 기간을 지켜 완공하는 부담을 지는 상품이다. 통상적으로 시공사 책임준공 기한으로부터 6개월이 지난 기간까지 신탁사가 책임준공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대주단에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 자체적으로 책임준공 책임을 지기 어려운 중소 건설사들이 신탁사 보증에 기대 사업을 수주해왔다.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경기가 악화하면서 책준형 신탁이 부실 뇌관으로 지목됐다. 경기 악화로 중소 건설업체의 유동성이 급격히 쪼그라들면서 PF 사업장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서 리스크가 확산할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법정관리를 신청하거나 파산 위기에 내몰린 중소 건설사도 늘어났다. 이들이 지키지 못한 준공 의무는 신탁사에 전이됐다.
실제 대주단이 신탁사에 책임을 묻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례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신한자산신탁은 인천 원창동 물류센터 건설공사 PF 대주단으로부터 57억 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를 당한 바 있다. 이어 경기도 안성시 물류센터와 평택시 물류센터 건설공사 PF 대주단에게서도 77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받은 사실이 추가로 알려졌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14개 신탁사 기준 책임준공 기한을 넘겨 소송에 직면한 사업장 관련 PF는 1조90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신탁사 전체 자기자본은 5조5000억 원으로, 현재 손해배상을 물어줘야 하는 PF 규모가 자기자본의 35%에 이르는 셈이다. 6개월 안에 책임준공 기한이 도래하는 등 경과가 임박한 사업장 PF까지 합치면 2조7000억 원으로 늘어난다.
신탁사 14곳의 책준형 관리형토지신탁과 관련한 PF 잔액은 24조8000억 원으로 자기자본의 4.5배에 달한다.
책준형 신탁이 자취를 감추면서 대안으로 떠오른 건설공제조합 책임준공 보증상품이 이를 대체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합이 지난해 12월 출시한 뒤 30여 건의 신청이 들어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 상품 역시 시공사가 약정한 기일까지 책임준공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조합이 6개월을 가산한 기간 내 보증시공을 완료하는 상품이다. 만일 보증시공을 완료하지 못하면 조합이 미상환 PF 대출 원리금을 보증금액 한도에서 보상한다.
하지만 조합 책임준공 보증도 대상 건설사 범위가 한정돼 있어 결과적으로 책준형 신탁의 대안이 되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보증 취급 대상 건설사를 회사채 BBB+ 등급 수준 이상 및 시공능력 순위 100위 이내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조합에 따르면 해당 기준을 만족하는 건설사는 30개 미만이다.
취급 한도는 1년에 1조 원 가량, 3년간 최대 3조3000억 원이다. 신탁사 14곳 책준형 토지신탁 PF 잔액 대비 8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조합은 향후 경기 상황을 감안해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조합이 건설사 대신 갚아준 돈이 늘어나고 있어서다. 지난해 2분기 기준 조합 대위변제 실적은 797억2200만 원으로, 2022년 전체 대위변제 실적(609억9000만 원)을 이미 넘어섰다. 책임준공 보증으로 미상환 PF 대출 원리금 보상을 해줘야 할 경우, 이 비용 역시 대위변제 실적에 포함된다.
건설공제조합 관계자는 "사업성 위험을 심사해 보증을 실시할 예정"이라며 "심사 자체가 어렵기는 하지만 감당해낼 만한 시공사, 사업장을 판단해 보증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