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그룹 AOA 출신 배우 설현이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한 말입니다. 그는 대중교통을 애용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숏폼' 때문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죠.
설현은 일어나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씻을 때도, 화장할 때도 언제 어디서든 숏폼을 보고 있었는데요. 온통 숏폼 생각뿐인 모습을 본 네티즌들은 "설현도 우리랑 똑같다"며 박장대소했습니다.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 틱톡 등 숏폼 콘텐츠는 유행을 넘어서 콘텐츠 유형의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각종 챌린지가 유행하더니, 챌린지로 인기를 끌며 인플루언서로 거듭나기도 하고, 연예인, 심지어는 정치인들까지 숏폼 콘텐츠를 선보이죠.
짧고 재밌어서 단숨에 볼 수 있는, 그래서 끝없이 보게 되는 숏폼 콘텐츠. 멈출 줄 모르는 인기에 숏폼만의 '독주'가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요. 업계에서는 기대와 조금 다른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15초~1분 내외의 짧은 영상인 숏폼 콘텐츠는 빠르게 재미와 감동, 웃음, 정보를 전달하고, ‘좋아요’, ‘댓글’, ‘공유 기능’, 또 알고리즘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합니다. 이용자의 집중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온라인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플랫폼이 됐죠.
숏폼 열풍은 중국 바이트댄스의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이 주도했습니다. 앞서 틱톡은 2016년 전 세계 150개 국가와 지역에서 75개 언어로 숏폼 서비스를 처음으로 선보였는데요.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숏폼 혁명'을 일으켰고, MZ세대의 놀이·소통 수단으로 부상하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플랫폼 강자로 순식간에 자리매김했죠.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대형 SNS 플랫폼도 전쟁에 뛰어들 정도로 틱톡이 쏘아 올린 숏폼 열풍은 대단했습니다. 인스타그램은 2020년 '릴스'를 출시했고, 유튜브는 2021년 7월 '쇼츠'를 내놨죠.
숏폼 콘텐츠는 짧은 시간 내 흥미로운 재미를 주는 스낵컬처를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관심에 힘입어 발전했습니다. 노래에 맞춰 간단한 안무를 선보이는 등 각종 챌린지도 꾸준한 유행 중 하나인데요. 이 과정에서 탄생한 음악이 SNS 밖의 무대에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최근 유명 인플루언서들 사이에는 서이브가 발매한 '마라탕후루'라는 곡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내레이션 방식의 대화가 오고 간 후 후렴구에서는 '탕탕 후루후루 / 탕탕탕 후루루루루'라는 가사가 신나는 리듬과 함께 흘러나오는데요. 단순한 곡 구성임에도 중독성 있는 가사와 리듬은 수많은 이들을 홀렸습니다.
개그맨 김경욱의 부 캐릭터 다나카와 인플루언서 닛몰캐쉬가 뭉쳐 만든 ASMRZ의 '잘 자요 아가씨' 챌린지는 더보이즈, 마마무, NCT 위시, 제로베이스원 등 인기 아이돌 그룹 멤버들도 참여하면서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일본 만화에 나오는 집사 콘셉트를 활용한 기존 영상들이 인기를 끌면서 음악방송에도 진출했는데요. SBS MTV '더 쇼' 방송에 출연한 두 사람을 본 네티즌들은 "K팝과 J팝 둘 다 자기 문화 아니라고 다투는 중", "K팝에 독을 풀었다", "제발 하고 싶은 거 그만해" 등 반응을 내놔 웃음을 자아냈죠.
숏폼 콘텐츠 기획과 제작이 가장 활발한 곳은 무엇보다 K팝 시장이 아닐까요?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많은 가수는 앨범 제작 단계에서부터 숏폼 콘텐츠를 기획합니다. 반복되는 노래 구절, 중독적인 후렴구, 화려하면서도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안무, 눈빛과 표정을 사용하는 킬링파트 등을 트렌드와 잘 맞게 만들어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하는 거죠.
숏폼을 활용한 흥행의 대표적인 사례는 피프티 피프티의 '큐피드'(Cupid)인데요. '큐피드'는 챌린지를 통해 1000만 개에 달하는 틱톡 게시물이 업로드된 바 있습니다. 지난해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 최고 순위 10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도 숏폼을 통한 바이럴 덕분이라는 분석이 우세합니다. 지난해 12월에는 10년 전 발매된 엑소의 '첫눈'이 원곡의 스페드 업(Sped Up·속도를 높인) 버전 챌린지 영상으로 SNS에 퍼지면서 멜론 차트 정상을 차지했죠.
숏폼 자체 제작은 물론, 가수들의 댄스 챌린지가 서로의 신곡 홍보를 돕는 일종의 '품앗이' 형태로 진화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트와이스, 전소미 등은 아예 틱톡에서 노래를 선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빌보드는 지난해 10월부터 아예 '틱톡 차트'를 공식적으로 만들어 매주 틱톡에서 인기를 끈 노래들을 선정, 발표하고 있습니다. 숏폼 확산이 국내외 음원 차트에 미치는 영향력이 입증된 셈입니다.
가요 산업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미국 경제매체 쿼츠에 따르면,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오른 노래의 평균 길이는 2013년 3분 50초에서 2018년에는 3분 30초로 줄어들었습니다. 3분 30초 이하의 짧다고 느낄 수 있는 노래의 비중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2015년 1% 수준에서 2018년에는 6% 수준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죠. 숏폼에서 곡을 전반적으로 노출할 수 있어야 음원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지는 탓에 숏폼 길이에 맞춰 노래 역시 짧아진다는 분석입니다. 특히 아이돌 음악 시장에선 3분을 넘기는 곡을 찾기가 어려워졌을 정도죠.
숏폼은 매출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1일 열린 '디지털 마케팅 서밋(DMS) 2024'에서 글로벌 비디오 커머스 기반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 기업 샵라이브의 강범석 본부장은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상품을 구매할 때 라이브 영상이나 숏폼 영상 등을 활용할 경우 구매 확률이 3.6배나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는데요. 숏폼을 통해 시각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했을 때 재미와 호기심을 유발하면서 실질적인 구매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숏폼 플랫폼에선 재미가 주가 되는 만큼, 방송 클립을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7일 HR테크기업 인크루트가 직장인 87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과반에 가까운 46.3%가 '예능 등 방송 클립'을 본다고 답했는데요.
인기 예능 '최강야구'의 유튜브 쇼츠 영상은 조회 수 수십만 회는 기본, 수백만 회까지 어렵지 않게 기록합니다. 이렇다 보니 유튜브는 지난해 2월부터 '유튜브 쇼츠'에도 광고 수익을 배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숏폼의 인기가 플랫폼의 수익 구조까지 바꿔버린 셈입니다.
범람하는 숏폼 콘텐츠에 부작용 우려가 없는 건 아닙니다. 최근 긴 글에 집중하기 어렵거나 기억력 저하를 호소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짧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쾌락을 추구하다 보니, 현대인의 평균 집중력이 10분 이내로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죠. 참고로 주의력이 짧은 동물로 대표되는 금붕어의 평균 주의 지속시간은 9초입니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숏폼을 '디지털 마약'에 빗대기도 합니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의 저자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는 "숏폼은 사람이 더 빠르게 많은 도파민을 얻을 수 있는 합성마약과 비슷하다"고 말했는데요. 짧고 강렬한 쾌락에 익숙해지면 일상생활에 흥미를 잃고 팝콘 터지듯 더 큰 자극만을 추구하는 '팝콘 브레인'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실정입니다.
이처럼 숏폼은 많은 이들의 일상에, 또 관련 산업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롱폼이 쇠퇴하고 숏폼의 독주가 이어질 것으로만 전망할 수는 없는데요. 숏폼의 선두주자, 틱톡이 최근 롱폼을 시도한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각종 SNS 플랫폼이 경쟁적으로 틱톡의 성공 방식을 좇자, 틱톡은 되레 영상 길이를 늘이기 시작했습니다. 출발 당시 15초 이내 짧은 영상만 허용했던 틱톡은 2021년 최대 2배 수준인 34초까지 영상 길이를 늘이더니 올 초에는 일부 창작자들에게 30분 분량의 영상 업로드를 허용했죠. 현재는 60분짜리 영상을 테스트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IT매체 더버지는 "최근 틱톡이 더 길고 유튜브와 유사한 콘텐츠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올 초에는 일부 틱톡 크리에이터들이 세로형 대신 가로형 클립을 공유하면 콘텐츠 인기가 증가할 것이라는 알람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지난해부터 틱톡 크리에이터들은 틱톡의 수익 창출 프로그램에서 1분 이상의 영상을 올려야만 수익 배분을 위한 자격을 얻을 수 있기도 하죠.
틱톡의 이 같은 방침은 유튜브가 장악 중인 롱폼 시장까지 눈독 들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유튜브 역시 '쇼츠'로 숏폼 형식을 선보이면서 시장에서 한몫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틱톡 입장으로선 숏폼 시장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경쟁자의 주력 시장에 발을 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수익성 증대도 틱톡이 영상 길이를 늘이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틱톡이 수익성을 확대하기 위해선 광고를 늘려야 하는데, 동영상이 길어져야 광고주가 더 자세히 제품 홍보를 하고 크리에이터가 제품간접광고(PPL) 등으로 소득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죠.
여기에 영상 시장에서 숏폼과 롱폼 콘텐츠가 각자 다른 이유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도 언급됩니다. 3년 전 게재된 유튜브 채널 '침착맨'의 '침착맨 삼국지 완전판' 영상은 최근까지도 조회 수가 꾸준히 늘어 2000만 회 돌파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 영상의 길이는 무려 5시간입니다. 코미디언 유재석이 출연하는 '뜬뜬' 채널의 '핑계고' 콘텐츠는 나올 때마다 수백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죠. 역시 영상 1개당 1시간 안팎의 길이로, 숏폼만이 사랑받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죠.
단순히 숏폼과 롱폼이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 유튜브 영상을 편집한 쇼츠, 인기를 끈 유튜브 쇼츠들을 여러 개 덧붙인 롱폼 영상 등 숏폼과 롱폼이 섞인 융합 형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틱톡은 아직 롱폼 기능의 정식 출시 계획은 없다고 밝혔지만, 올해 초 30분 길이의 영상을 올릴 수 있는 새로운 선택 기능을 테스트한 사실이 밝혀진 후 일부 사용자에게 적용된 것을 감안하면 60분 영상 업로드 기능도 곧 적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숏폼의 선두주자, 틱톡이 선보이는 롱폼 콘텐츠는 어떤 게 될지, 또 틱톡의 결정 이후 숏폼 시장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