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에 개봉한 ‘에이 아이’는 진짜 인간이 되어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AI 로봇 데이빗의 여정 그린 로드무비다. 영화는 희망과 사랑의 가치를 믿는 데이빗의 궤적을 통해 미래 사회에 도래할지도 모를 인간-AI 관계의 한 단면을 그린다. 죽은 사람을 AI로 복원해 산 사람에게 영상 통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설정의 ‘원더랜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다.
바이리(탕웨이)는 사망한 뒤 고고학자로, 태주(박보검)는 우주비행사로 복원된다.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는 AI다. 그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멀리 이주해 산다고 생각한다. 상대방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듯하다. 죽기 전 AI로 복원될지 말지 결정할 수는 있지만, 그 결정의 기억은 복원된 후 사라지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정황이고 추측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영화가 디테일한 설정을 설명하지 않아서다. 김태용 감독은 인터뷰에서 “다양한 케이스들을 파편적으로 보며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각했다”라며 “좀 위험한 방식이지만, 각자 사연들과 감정으로만 표현하고자 했다. 하나의 길을 깊이 가지 못하지만, 다양한 관계의 합을 보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게으르다기보다는 무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더랜드라는 가상 세계의 허술한 설계 방식을 문제 삼는 건 무용한 일이다. 감독이 건너뛰고 싶은 걸 왜 건너뛰었냐고 묻는 셈이니까. 문제는 바이리가 이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는 지점에 있다. 바이리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다시 엄마와 딸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사막에서 공항으로 차를 몰지만, 바이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사막에 처음 도착한 순간으로 계속 복귀한다.
이런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원더랜드 직원들은 바이리가 엄마와 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한다. 가족과의 재회 후 바이리는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는데,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직원들은 그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영화는 앞으로 바이리가 살아갈 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거나 있어도 그건 감독의 머릿속에만 있는 듯하다.
특히 이 영화가 영상 통화 속 태주를 다루는 방식은 꽤 문제적이다. 사경을 헤매던 진짜 태주가 돌아오자 정인(수지)은 영상 통화 서비스를 종료한다. 영화는 우주 공간에 있는 태주가 어딘가로 추락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단순한 시스템의 종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가 절명하는 듯한 느낌의 장면이다. 그렇게 AI의 존재는 산 사람에 의해 가볍게 제거된다.
감독은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진짜와 가짜를 넘나드는 세계가 시작됐다”라고 말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진짜가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가 될 수도 있다. 그럼 영상 통화 속 바이리와 태주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것의 진위 여부를 떠나 우리는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원더랜드’에 결여된 질문들이다.
비슷한 실정의 ‘에이 아이’는 로봇의 존재 방식을 충실히 묘사한다.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 데이빗의 주체성을 여러 각도로 포착한다. 이 같은 주체성이 바이리에겐 아주 조금 있고, 태주에겐 전혀 없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가상 세계로 돌아가야만 하는 바이리와 죽은 후 AI로 복원됐다가 다시 죽어야 하는 태주의 존재. 그들의 마음의 풍경이 ‘원더랜드’에는 부족하거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