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의 엄정한 중립성·규율 필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 입막음’ 사건 최후 변론이 진행된 지난달 28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날 할리우드 원로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법원에 등장한 건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는 “트럼프가 국가를 파괴할 것”이라며 트럼프를 비난하는 정치적 연설을 이어갔다. 자리에 나타나게 된 배경으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선거캠프의 요청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측은 즉각 반격했다. “조급한 바이든이 볼 장 다 본 배우까지 불렀다”며 “재판의 정치적 이용”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의 정치적 이용’,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 말은 미국이 앓고 있는 ‘사법의 정치화·정치의 사법화’ 단면을 드러냈다고 닛케이는 지적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중범죄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이 됐다. 재판은 2016년 대선 직전 트럼프가 불륜 상대로 알려진 포르노 배우에게 지급한 13만 달러(약 2000만 원)의 입막음 비용에 초점을 맞췄다. 트럼프 측 변호사가 해당 배우에게 대납했고, 트럼프 회사가 보전했다. 이때 ‘변호사 비용’으로 처리된 게 회계 부정으로 인정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닛케이는 이번 판결이 11월 대통령 선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도 중요하지만, 주목할만한 건 미국의 ‘사법부 독립성’에 대한 의구심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적지 않은 미국 유권자들은 이번 재판을 ‘중대하지 않은 사안’, ‘정치적 공세’, ‘의도된 재판’ 등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친민주 성향의 워싱턴포스트(WP)도 불법이 아닌 금품수수, 가벼운 회계부정 등을 중범죄로 인정한 것에 대해 “의혹들을 짜깁기한 복잡한 논리”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연방 검찰은 트럼프 입건을 검토하다 어렵다고 판단해 포기했다. 이번 수사를 주도한 뉴욕주 맨해튼 검찰의 앨빈 브래그 검사장도 처음에는 기소를 주저했다.
재판의 불씨를 지핀 건 ‘사법의 정치화·정치의 사법화’다. 트럼프 재판을 맡은 매슈 콜란젤로 검사는 바이든 정부로부터 법무부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직급인 법무차관 대행으로 임명됐다. 트럼프를 기소한 앨빈 그래그 검사도 민주당 소속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법 전쟁’은 더 치열해졌다. 트럼프 측근인 하원 법사위원장 짐 조던 공화당 의원은 브래그와 콜란젤로에게 증인 출석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했다. 사법은 ‘정치인들의 진흙탕 싸움장’이 됐다.
다만, 한국은 군사정권 이후 민주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생긴 ‘성장통’의 측면이 크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의 데이비드 칸 교수는 “한국의 대통령 기소는 군사정권 시절의 부패 관행을 드러냈고, 민주정치는 진퇴양난을 겪으면서도 진전해왔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하무관(以下無冠 )’, 닛케이는 이 말에 빗대어 현재 미국 정치를 진단했다. ‘왕관 없는 임금’이라는 뜻으로, 권력자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권력을 내려놓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또 사법이 정치의 ‘무기’가 되면 독립성을 잃고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다. 정치의 분열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사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한 중립성과 규율이 필요하다고 닛케이는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