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관세전쟁 대비 ‘물밑 총력외교’
때론 사진 한 장이 수십 권의 책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곤 한다. 2017년 3월 17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메르켈은 백악관에서 만나 악수를 한 뒤 카메라를 쳐다봤다. 그런데 트럼프는 계속해서 메르켈을 바라보지 않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카메라만을 응시했다. ‘손님 무시’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메르켈은 2년 전, 100만 명이 넘는 중동 난민 신청자들을 수용했고 자유무역을 옹호했다. 반면에 트럼프는 보호무역과 난민 규제 등을 외쳤다. 메르켈 혐오를 신임 미국의 대통령이 이 사진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7년이 훨씬 더 지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시 이런 예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는 11월 5일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세론이 주춤했다. 민주당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직을 내려놓았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대선 후보가 된 후 지지도가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계 각국이 트럼프의 재집권에 대책을 마련 중이다. 트럼프에 올인하고 있는 헝가리와 신중하게 ‘트럼프 2.0’에 대비 중인 독일의 입장을 비교해보자.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트럼프 집권 1기 때부터 미 대통령을 지지해왔다. 지난달 11일 워싱턴DC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75주년 정상회의 후 만찬장에서 오르반은 “아직도 바이든이 재선할 거라 믿느냐”고 참석했던 회원국 수반들에게 말했다. 만찬 후 그는 곧바로 플로리다의 마라라고 리조트로 가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만났다.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운데 이처럼 대놓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나라는 헝가리가 유일하다.
EU 회원국 헝가리는 법치주의 위반으로 EU 예산의 일부만 지원을 받았다. 판사 임명을 행정부의 통제 아래 둬 삼권분립을 훼손했고 독립적인 미디어를 탄압해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4월 제정된 EU의 신난민협약에 따르면 난민을 수용하지 않는 회원국의 경우 난민 한 명당 2만 유로, 약 3000만 원을 내야 한다.
EU 회원국들이 경제력과 인구에 비례해 난민 신청자들을 분담하는데 헝가리는 지금까지 이를 거부해왔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정한 이 난민협약조차 헝가리는 지키지 않겠다고 버텨왔다.
이민 반대와 친러시아적 입장 등 오르반과 트럼프는 공통점이 많다. 트럼프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르반 총리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헝가리와 다르게 독일의 대책은 신중하면서도 치밀하다. 외교부에 대서양관계조정관이라는 직책이 있다. 1981년부터 있던 조직인데 주로 여당의 중진 정치인이 임명된다.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녹색당,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자민당)으로 구성된 ‘신호등 연정’은 2021년 말에 출범했다. 2022년 초에 자민당 4선 의원 미하엘 링크가 조정관이 됐다. 중도좌파 정당은 기본적으로 트럼프를 싫어하지만 냉철한 국익을 고려해 조정관 제도를 유지 중이다.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의회외교도 병행하는 게 대서양관계조정관의 역할이다. 링크 조정관은 지난 2년간 공화당 인사들과 수시로 접촉했다. 독일 연방하원 의원들과 함께 조지아와 텍사스 주를 방문했다. 지멘스와 다국적 화학기업 BASF 등이 여기에 투자해 일자리를 만들었다. 조정관이 이끈 대표단은 투자 기업인들과 텍사스 주지사와 정치인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두 나라 관계를 이야기했다. 두 주 모두 공화당 의원이 주지사이다.
그렉 애벗(텍사스), 브라이언 켐프(조지아) 지사는 트럼프를 지지하지만 주에 투자한 독일 기업들의 움직임에도 민감하다. 트럼프 출범 후 보호무역이 강화돼 투자한 기업들이 추가 투자를 줄일 수 있다. 유권자 표에 민감한 주지사가 볼 때는 신경써야 한다. 링크 조정관은 최근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주지사들과 자연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며 이들이 독일 기업들의 우려를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봤다. 설령 트럼프가 재선되더라도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되는 외국 기업의 투자, 일자리 창출에 해가 되지 않도록 이렇게 접근한다.
독일 정부는 또 지난해 중반부터 트럼프 진영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해왔다. 되도록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트럼프 측 인사들과 만나 교류해왔다. 올 초에는 외무부 안에 미 대선에 대비한 비공식 태스크포스(TF) 조직을 만들었다. 대서양관계조정관과 외무부 내 대서양관계국, 미국 주재 독일 대사관이 여기에 참여 중이다.
미국 주재 안드레아스 미하엘스 독일대사는 링크 조정관 및 독일 연방하원 의원단과 함께 지난달 중순 공화당의 전당대회에도 참석했다. 공식행사에 참석해 공화당 주요 인사들과 토론도 벌이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독일은 미국에서 35대의 F-35 전투기와 60대의 CH-47F 장거리 전략 수송기 치누크 헬기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총 160억 유로가 넘는 대규모 거래다. 경제력을 무기로 내세워 외교 활동을 전개해왔다.
트럼프 재선이 독일 경제에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독일이 대책 마련에 발벗고 나섰다. 독일의 무역 의존도는 80%로 자유무역이 제대로 작동돼야 독일 경제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트럼프는 재선 시 모든 교역 상대국에 10% 관세, 중국에 60%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은 2016년부터 독일의 최대 교역상대국이고 미국은 그 다음이다. 트럼프가 독일산 수입품에 10%, 중국산에 60% 관세를 부과할 경우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은 2025년에 0.3%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중국이 미국의 관세 부과에 40%포인트 추가 관세로 미국산 수입품에 맞대응한다면 독일의 GDP는 더 하락한다. 1, 2위 교역 상대국으로의 수출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옥스퍼드이코노믹스와 독일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이 관세전쟁을 벌일 경우, 2028년이 되면 독일의 GDP는 무려 1.4% 정도 줄어들 것으로 추정됐다.
수출 챔피언 독일은 ‘트럼프 2.0’이 현실이 된다손 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이런 인식을 공유하기에 독일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대책을 마련해왔다. 트럼프 2.0은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 국익을 앞세운 총력 외교를 기대해본다.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