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희 번역가 "정교한 대본, 르네상스 시대 조각상 같아"
1985년 미국의 배우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사망한다. 미국은 이로 인해 에이즈 공포에 휩싸인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바로 이 시기, 새로운 밀레니엄을 15년 앞둔 미국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유대계 성소수자 작가인 토니 커쉬너의 작품이다. 1993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다. 새 시대의 변화를 앞두고 동성애자, 흑인, 유대인, 몰몬교인, 에이즈 환자 등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정체성 혼란을 다루고 있다.
이 연극은 '프라이어'(손호준ㆍ유승호)와 '루이스'(이태빈ㆍ정경훈), '조셉'(이유진ㆍ양지원)과 '하퍼'(고준희ㆍ정혜인) 커플의 대비를 통해 당시 미국인들의 고뇌와 혼돈을 그리고 있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순탄치 않은 궤적을 통해 삶의 보편적인 문제를 질문하는 방식이다.
고귀한 백인 가문의 프라이어는 동성 연인인 루이스에게 자신의 에이즈 발병 소식을 전한다. 루이스는 프라이어의 병에 공포감을 느끼고 그의 곁을 떠난다. 한편 미국 연방 법원에서 근무하는 수석 서기관인 조셉은 퀴어 정체성을 숨기고 하퍼와 결혼한다.
연극 중반부에 두 커플은 한 무대에서 마치 다른 공간이 있는 것처럼 연기한다. 루이스는 에이즈에 걸린 프라이어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조셉은 하퍼에게 자신이 퀴어임을 고백한다. 이 장면은 마치 네 인물이 서로 다른 대상에서 포효하는 것처럼 표현돼 극적인 울림을 자아낸다.
베트남 전쟁 패배 후 혼란을 겪던 미국은 1980년대를 맞아 로널드 레이건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레이거노믹스)으로 경제 호황을 누렸다. 동시에 미국은 군사적으로 소련을 압도하기 위해 노력했고,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추월에 불안을 떨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잘생긴 백인 남성인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사망했고, 흑인 남성인 마이클 잭슨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며 미국 대중음악을 주도했다. 가능성과 위기, 희망과 불안이 동시에 존재했던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바로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 집약돼 있다.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젠더적ㆍ종교적ㆍ인종적으로 극심한 차별을 당하는데, 각자의 고뇌를 통해 존재 이유에 대한 근원적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신유청 연출은 "각각의 인물이 지닌 근원적인 마음에 닿는다면 분명 오늘의 우리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높은 벽으로 에워싼 요새 같은 무대 디자인은 인물들의 내면을 형상화하며 극의 몰입을 더 한다. 상처를 감추거나, 상처를 덜 받기 위한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했다는 게 이엄지 무대디자이너의 설명이다.
대본 번역은 영화번역가로 유명한 황석희 씨가 맡았다. 그는 "문장 간의 연결이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균형적이고 논리적이어서 마치 정성스럽게 깎은 르네상스 시대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했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이 외에도 연극에는 이효정, 김주호, 전국향, 방주란, 태항호, 민진웅, 권은혜 등이 출연하며 극의 활력을 더한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내달 2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